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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원’ 외상 전표의 추억

기사입력 2016-10-11 12:47

요즘은 현금보다 카드를 많이 쓰는 추세다. 누구나 물건값을 낼 때 돈 대신 쓸 수 있는 카드 한두 장씩은 가지고 있다. 필자도 얼마 전까진 여러 은행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었다. 은행마다 장점을 자랑하며 권하는 바람에 멋도 모르고 여러 장의 카드를 만들었지만 쓰다 보니 하나의 카드로 몰아서 소비하는 게 포인트를 모으는 방법도 될 수 있고 각 카드마다 있는 연회비를 줄일 수 있어 불필요한 비용 절감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과감하게 주거래 은행의 신용카드 한 장만 남기고 다 취소해버리고는 현명한 처사였다고 자화자찬했다.

▲‘영춘원’ 외상 전표의 추억 (박혜경 동년기자)
▲‘영춘원’ 외상 전표의 추억 (박혜경 동년기자)

신용카드의 장점 중 하나는 물건을 살 때 당장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고 3개월 무이자나 할부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목돈을 한꺼번에 내지 않고 나누어 내니 그만큼 합리적이고 이익일 것 같지만 그건 외상이나 마찬가지다.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외상을 좋아한다는 뜻일까? 필자는 외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지불해야 할 걸 미루는 게 찜찜하다. 카드로 결제할 때 액수가 좀 크면 3개월로 나누어 내는 방법을 썼는데 무이자로 나누어 내면 된다니까 그게 이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몇 개월 무이자로 결제하면 포인트가 붙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포인트도 돈인데 붙지 않으면 손해다. 며느리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한 달에 나가는 돈이 너무 많아 일시금으로 결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이자로 몇 개월에 나눠 내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소비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요즘엔 외상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려운데 옛날에는 빈번한 일이었다. 동네 가게에서도 심심치 않게 외상을 했고 드라마에 나오는 옛날 술집엔 ‘외상 사절’이란 팻말이 꼭 붙어 있었으니 그만큼 외상이 많았던 시절이다.

외상에 대해 생각하니 재밌는 기억이 난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돈암동에 살았는데 동네에 ‘영춘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요즘도 시내에 나가거나 들어올 때 꼭 지나치는 건물이다. 지금은 다른 점포가 들어섰지만 필자가 어릴 때는 꽤 오랫동안 중국 사람이 경영했다. 자장면이라도 먹으러 가면 중국말로 쏼라쏼라 하는 말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고 음식도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우리 가족 단골집이었다.

중국인 사장님에게는 아주 잘생긴 아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배달원으로 일했다. 직접 가서 먹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배달을 시켜 먹었고 그때마다 잘생긴 아들들이 번갈아 배달을 왔다. 그런데 지금도 재미있게 기억되는 건 음식을 시켜먹고 돈을 내지 않고 메모지 조각에 전표를 써서 준 일이다. 짜장면 2그릇 또는 우동 하나, 탕수육 하나, 이렇게 메모지에 썼다. 얼마나 많이 시켜먹었는지 잘생긴 그 집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우리가 써준 전표를 수북하게 들고 결산하러 찾아왔다. 그러면 전표 하나하나 우리 가족이 쓴 글씨인지를 확인하고 돈을 줬다. 가끔씩은 우리 글씨가 아니네! 어쩌네! 하면서 실랑이도 벌어져서 그다음부터는 꼭 사인을 하기로 약속했던 우스운 일도 있었다.

한 달에 몰아서 음식값을 지급하면 ‘영춘원’에서는 특제 탕수육이나 고구마로 만든 중국식 맛탕을 서비스로 갖다 주었는데 그 맛이 너무 훌륭해서 지금도 우리 자매가 모이면 “그거 정말 맛있었지?” 하고 추억한다. 가느다란 설탕실이 죽죽 늘어나는 바삭한 맛탕은 요즘 맛탕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었다.

요즘엔 외상을 주는 음식점이 거의 없다. 그땐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공무원이신 아버지가 월급을 받기 전에는 돈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외상으로 시켜 먹고 월급을 타면 갚았던 것이다. 참 재미있는 서로의 방식이었다는 생각이다. 외상이라는 걸 싫어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서로 믿고 편의를 봐주었던 정겨운 시절이 그립다. 우리에게 외상을 주고,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받아가고, 맛있는 요리를 서비스로 갖다 주던 잘생긴 배달원 아들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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