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에 조성규, 배우는 김재욱이 주연이고, 김지유, 진아름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나온다. 나오는 사람도 몇 안 되고 촬영 장소도 거의 실내라서 돈 안 들이고 만들었을 것 같다. 장르가 판타지 코미디로 되어 있다.
가끔 비현실적인 영화도 영화 보는 재미가 있기는 하다. 그러니까 영화가 아닌가. 그러나 사실적인 영화는 비장한 준비를 하고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함이 따른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영화는 “영화는 영화다”라고 생각하고 보면 된다.
이 영화는 '1㎜' 'Refill' 'Seat' '겨울 산'이라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김재욱이 모두 나오기 때문에 연속성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1㎜에서 김재욱은 매일 미용실에 드나든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물어보면 “1㎜"요 라고 말한다. 얼핏 본 보조 미용사의 짧은 치마와 쪽 빠진 멋진 다리가 기억에 남는다. 매일 1㎜씩 머리를 자르면서 보조 미용사의 치마도 1㎜씩 짧아진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머릿속에는 온통 에로틱한 상상을 하며 즐긴다. 어느 날 늘 담당하던 미용사가 안 나오고 다른 미용사가 김재욱에게 어떻게 잘라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1㎜요“라고 말했는데 눈을 떠보니 1㎜만 남겨두고 머리를 다 잘라 버린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고 그래서 코미디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Refill'에서는 카페가 나온다. 그 공간에는 김재욱과 여종업원 단둘이다. 여종업원은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다. 김재욱은 그 여인을 주인공으로 리필을 요구할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는다는 상상을 하며 노트북에 시나리오를 쓴다. 나중에 들어온 말 많은 남자무리들에 밀려 카페를 나오면서 상상은 끝난다.
세 번째 에피소드 “Seat'에서는 어두운 영화관이 나온다. 영화도 에로틱하고 혼자 온 옆자리의 젊은 여자에게 눈길이 간다. 상상으로는 이미 그에게 가 있다. 그러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여자는 나가버린다.
네 번째 에피소드 ‘겨울 산’에서는 3명의 여자를 만나 에로틱한 대화를 이어가는데 정작 산사에서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정작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상수는 언제나 그대로 있는 수이고 변수는 늘 변하는 수이다. 상수와 변수는 현실과 상상에 따라 상수도 될 수 있고 변수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영화 중 시사회에 나온 감독 말이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한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하는 행동을 다른 한 사람이 보고, 또 그 세 사람을 다른 사람이 보고, 또 그 네 사람을 다른 사람이 본다는 식의 끝없는 전개를 설명하다 자가당착에 빠진다.
상상은 자유이다. 젊은 남자 머릿속에는 온통 에로틱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원래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의 여자들은 사무적으로 무표정하며 상상을 벗어나고 나면 언제 봤냐는 식이다.
시니어들의 현실에서 매일 미용실에 가는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흑심을 품고 가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이나 갈까 말까 하는 미용실에 돈 아깝게 1㎜만 잘라달라고 할 사람도 없다. 그나마도 한동안 미용실을 다니다가 남자 이발사가 있는 모범 이발관으로 옮긴 지 오래다. 현실도 실용적으로 변했지만, 상상도 시니어의 틀에 스스로 들어가 버린 느낌이다. 젊은 여종원업원과 단둘만 있는 조명 좋은 조용한 카페에서는 스스로 어색해서 문을 열다 말고 나가거나 들어갔어도 얼른 차 마시고 나온다.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옆에 여자 혼자 있으면 역시 신경 쓰여서 도망친다. 산에 올라가는데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은 벌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간 스스로 막아 두었던 상상의 세계의 문을 열어볼 생각은 하게 될지 모른다. 상상 세포는 다시 살려 둬야 마음이라도 늙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