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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가 만난 사람] “90세 넘어서도 노래하고 싶어요”

기사입력 2015-09-21 13:40

원로가수 명국환

▲원로 가수 명국환. 박재청 포토원 객원기자.
▲원로 가수 명국환. 박재청 포토원 객원기자.

원로가수 명국환(82)의 명함은 상당히 단순하다. 한문으로 원로가수 明國煥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덩그러니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뒷면에는 데뷔연도와 히트곡 4곡이 적혀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무심함 속에 보이는 원로의 품격은 비로소 말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편집자 주>

지난해 12월,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장에 눈썹이 짙은 노신사가 포토월 앞에 섰다. 기자들은 ‘누구지? 일단 찍고 보자’라며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허나 노신사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포토월에 서 있으니 어떠한 상을 받는 수상자 정도로만 짐작할 뿐,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영등포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 뒤섞여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듯한 그의 이름은 명국환. 60년 전에는 한국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가수, 지금은 원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수다.데뷔연도는 1954년. 그가 데뷔했을 때 태어난 사람도 이미 환갑을 넘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 명국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단어는 고귀하다.

원로(元老).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결국 명국환에게 원로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참석한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자리를 빛낸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 둘. 어쩌면 가수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이때. 그는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노신사 명국환이 인터뷰 도중 노래를 한다.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부르는 그의 노래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슬프고 애잔하다. 하지만 그 깊이는 황혼이 돼서야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든 둘의 나이에도 자신은 아직도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라고 표현하는 명국환. 나이 탓인지 사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주 커지지만 옛 시절의 기억들을 토해내는 목소리는 꽤나 또렷하다.

◇악극단원을 꿈꾸던 소년

소년 명국환의 꿈은 악극단원이 되는 것이었다. 악극단원이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노래하는 것. 그에게 그 꿈은 최고의 낭만이자 로망이었다. 밤이면 동구밖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던 소년.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그는 이미 귀여운 스타였다.

“노래 한곡 해 보거라”하는 어른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수하고 애달픈 노래 솜씨를 뽐낸다. 신청하는 노래 대부분 다 불렀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던 소년 명국환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은 목청 하나 믿고 돈을 번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노래를 잘 해봐야 얼마나 잘 하겠느냐’는 생각에 악극단원이 된다는 꿈을 포기하라며 소년 명국환에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모님의 결사반대였던 것이다.

“제 성격이 온순해서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아버지가 반대하시자 대들었어요. 나는 가수가 될 거라면서요. 간섭하면 반항을 하겠다고 역으로 아버지께 엄포를 놓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지역 콩쿠르 대회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에 입선해 가수가 될 소질을 보이더니, 6·25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가수의 꿈을 마침내 이룬다.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정식적인 가수로 데뷔를 했죠. 그게 1954년입니다. 그때 생각했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말이죠.”

▲83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공연활동을 하는 원로가수 명국환. 박재청 포토원 객원기자.
▲83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공연활동을 하는 원로가수 명국환. 박재청 포토원 객원기자.

◇없어서 못 팔았던 레코드

“6·25전쟁 이후 이북의 실향민을 달래는 노래인 ‘백마야 울지마라’가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여기에서 ‘백마’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이 실향민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 줬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노랫말과 애절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명작 한 곡이 탄생했다. ‘백마야 울지 마라’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타자 전국 팔도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레코드 상들은 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다. 레코드 가게 근처의 여관에서 발매 전날 밤을 새워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했다.

그가 백마야 울지 마라, 아리조나 카우보이,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던 그 시기에 대중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레코드가 아니면 라디오뿐이었다. 그마저도 여건이 열악해 사전 녹음방송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라디오 생방송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많다.

“1960년대 흑백TV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라디오 전성 시대였죠. 그런데 오로지 생방송밖에 할 수 없었죠. 라디오에 출연하면 모든 장르의 노래를 총망라해서 불러야 했는데, 어떤 때는 음정과 가사를 모르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라디오에도 방청객이 있던 그때에는 가사를 틀리면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청춘의 삼색 깃발

“장미꽃이 피어나는 새파란 가슴 / 저 하늘에 펄럭이는 청춘의 삼색 깃발 / 달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 별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명국환의 노래 ‘청춘의 삼색 깃발’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그의 이 노래는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6·25전쟁 이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이 노래는 사찰계(현 국정원)의 타깃이 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을 쓰면서 전후의 아픔을 딛고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 가사가 발목을 잡았다. ‘장미꽃’과 ‘깃발’ 그리고 ‘달려가자’는 노랫말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장미의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통상 ‘장미는 빨간색’이라는 통념이 있던 시절, 그것은 공산주의의 빨간색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깃발’ 또한 북을 상징하고 ‘청노새가 달려가자’는 것도 ‘북으로 당장 넘어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6·25전쟁 때 뿜었던 피가 채 마르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곡은 그렇게 해석됐다.

작사가 손로원과 명국환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상이 의심된다며 사찰계에 불려갔던 것도 수차례. 졸지에 ‘빨갱이’로 낙인 찍힐 판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웠죠. 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빨갱이’로 몰릴 판이었으니까요. 조사 과정에서 손로원 작사가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을 강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죠.”

▲1. 백마야 울지 마라 앨범 2. 명국환 힛트 앨범 NO.1 3. 신태양 가요 앨범 4. 명국환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앨범.
▲1. 백마야 울지 마라 앨범 2. 명국환 힛트 앨범 NO.1 3. 신태양 가요 앨범 4. 명국환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앨범.

◇원로의 꿈

명국환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리고 왕성하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날에도 부산에 공연을 하러 갈 만큼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팔도를 누빈다. 하지만 이런 현재가 오기까지 오랜 기간의 정처 없는 휴식 기간이 있었다.

“1985년에 KBS에 ‘가요무대’가 생기고 나서 무대에 많이 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이 자리를 채우면서 제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원하지 않게 계속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미련하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었지 뭐.”

이제는 후배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품고 있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꿈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머쓱해 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한다.

“남들이 이 나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하면 욕심이라고 해요. 앞으로 10년만 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사실 제 목소리가 살아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 나이에 현역으로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아직도 공연장에 가면 한 차례 공연에 몇 백만원을 받으니 이만한 능력이 어디 있겠어요?”

1970년대부터 KBS 가요무대가 시작됐던 1985년까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이, 노래만 불렀던 ‘숙맥 원로’ 명국환은 이제 옛 것을 그리워하는 오늘날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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