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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LIFE] “농사가 바로 예술입니다”

기사입력 2014-07-01 16:07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천호균 (주)쌈지농부 대표 ‘생긴대로’ 살다

쌈지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적 기질을 가진 독자적 토종 패션 브랜드 쌈지. 10년 동안 운영됐던 예술가들의 인큐베이터 쌈지 스페이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뮤지션들의 축제의 장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인사동의 쌈지길 등은 쌈지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감각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결과들이었다. 그러나 기업으로서의 쌈지는 2010년에 부도가 났다. 쌈지의 주인장이었던 천호균 대표는 ‘장사’를 버리고 ‘농사’로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쌈지의 정신을 농업과 연결시킨 (주)쌈지농부를 통해서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저는 남들 신경 엄청 쓰는데 남들은 제가 신경 안 쓰는 줄 알아요.”

1949년 생 소띠, 올해로 예순여섯 살인 천호균 대표의 첫 모습은 ‘쌈지’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신적 브랜드의 수장다운(?) 수더분한 외모와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10여 년 전, 예술인마을에 먼저 자리를 잡은 지인의 소개로 헤이리 파주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주)쌈지농부를 세우고,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농사와 예술의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쌈지에서의 ‘예술’을 농업으로 이어가다

천 대표는 쌈지농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느림의 미학을 조명하는 슬로우 아트(slow art)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어떤 작가는 농사를 짓는데, 밭 이름이 ‘반만 먹자’다. 농사를 지어서 사람은 딱 반만 먹고 반은 동물들과 나눈다. 원래 농사는 같이 먹으라고 하는 것, 그 철학에서 출발한다. 갤러리에서 병아리를 부화시켜 2주 정도 키워 독거노인들에게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하는 작가도 있다.

“쌈지를 할 때, 장사를 하면서도 마케팅을 예술로 했죠. 그 아트 마케팅을 농사에서도 융합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쌈지에서 시도했던 ‘예술’을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가 되겠죠.”

그는 예전 인터뷰에서 과거에 패션디자인상 심사위원장을 하면서 ‘아름다움에는 순위가 없다’는 문제적 심사평을 낸 바 있다고 자평한 바 있다. 교육과 사회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아름다움을 고정시키려 하는데, 그는 모든 생명이 ‘생긴대로’ 저마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편견 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굴해서 보여주는 이가 예술가라는 게 그의 지론. 생각해보면 농업은 그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실현시키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익숙한 기술 아니던가.

천 대표는 과거 쌈지 시절의 예술과 지금의 예술이 어떤 점에서 다르냐는 질문에 지금 농업을 통해 하는 예술은 거대담론으로 세상을,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농업의 생산성과 예술의 가치를 합치니 지속가능, 정의, 나눔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히는 천 대표의 지론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농업을 시작하니 가능한 한 농사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형보다는 내용이나 가치에 충실하게 말이죠. 그 절실함을 담다보면 지속가능한 예술로 이어집니다,”

농부할아버지, 손녀와의 소통 비결… 측은지심을 알게 되다

농업을 하면서 천 대표는 세 명의 손녀들과 더욱 친근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식물이라는 돌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약자를 돌봐서 길러내야 하는 농업의 특성이 소통의 비결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배경이나 교육이 아이들의 착한 속성을 계속 유지시켜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약자를 측은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마음을 유지시켜주는 교육 말이죠. 농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한 것들에 대해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니까, 그게 아이들의 속성하고 일치하는 거 같아요. 농업이 만들어 준 제 속성이 손녀들의 속성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죠.”

인생이모작을 진행하는 시기의 동반자와의 관계도 궁금했다. 사실 많은 시니어들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동반자와의 관계에 관해 고민한다. 취미나 여가를 찾으려고 애쓰게 되는 건 동반자와의 관계가 불성실해진 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닐까. 그런데 이 부분에서 천 대표는 거의 ‘완성형’이었다.

“자랄 때 아버지가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분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가정일을 챙기셨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내를 위하는 문화를 알게 됐어요. 그리고 살다 보니 여자들이 아는 게 참 많더라구요. 그렇게 자라고, 살고 배워 오면서 아내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말 잘 안 듣잖아요? 그런데 저는 습관이 아주 잘 되어 있어요(웃음).”

천 대표는 부인을 ‘감사야’라고 부른다. 늘 배울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 감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할 때부터 ‘배우자’는 생각으로 부인을 배우자로 택했는데, 실은 ‘마누라말 잘 듣자’는 습관이 되다보니 얻게 된 것.

생각의 밭, 마음의 논을 가꿉니다

천 대표는 자신이 아직 초보 농부라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이제 막 인생 2막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중이라는 것. 그래도 먼저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시대의 일가를 이뤘던 사람으로서 인생이모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 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여 물어봤다.

“농부를 하다 보니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그 가치를 소비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돈을 많이 벌 때와 비교하여 행복하냐구요?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버는대로 만족스럽죠. 하지만 지금은 가치를 추구하다 보니 행복을 느끼게 되요. 만족보다는 행복을 찾아라,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생긴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에 가장 멋스러워 보이는 천 대표는 수익이 좀처럼 나지 않을 것 같은 ‘달동네’(천대표가 표현하는 절실하게 살기 위한 공간)에서 그만의 노련한 솜씨로 예술과 농사를 엮어 농부와 소비자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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