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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8000자루, 행복의 조력자” 연필 수집가 박용범

입력 2026-11-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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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좋아하는 것에 진심인 어른들 : 수집 덕후형

우리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것에 시간과 열정을 쏟으며 즐거움을 찾은 이들이 있다. 바로 ‘덕질’에 빠진 사람들이다. ‘덕질’이란 좋아하는 대상에 깊이 빠져드는 활동을 말한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어덕행덕(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덕질의 형태는 가수나 운동선수를 응원하는 팬 활동부터 수집, 운동·여행 명소를 찾아다니는 ‘도장 깨기’까지 다양하다.

▲연필 수집가 박용범 씨.
▲연필 수집가 박용범 씨.

좋아하는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물건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취향과 즐거움을 발견한다.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둘 모으다 보면 어느새 수집가가 되기도 한다.

건축가 박용범 씨는 연필에 푹 빠졌다. 약 7년간 모은 연필만 8000자루가 넘는다. 대부분 19~20세기에 만들어진 빈티지 연필이다. 오래된 연필 상자에는 각양각색의 디자인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필요에서 취향으로

박용범 씨에게 연필은 건축 설계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수정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다. 건축 설계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수정이 쉬운 연필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다 연필 자체에 관심과 호기심이 커졌고, 이는 수집이라는 취미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직업적으로 필요해서 연필을 사용했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 필기감이 좋고 품질 좋은 흑심을 사용한 멋진 연필은 없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유명한 제조사의 연필들을 구입해 직접 써보니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옛날에 만들어진 연필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까지 생겼죠. 연필을 ‘필요’가 아닌 ‘취향’으로 바라보게 된 거예요.”

박 씨는 주로 해외 경매 사이트나 애호가들과의 정보 공유를 통해 연필을 구한다. 수집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도 한다. 희귀한 연필을 얻기 위해 세계 각지의 수집가들과 경매에서 경쟁하다 보면 예상보다 큰돈을 지출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박 씨는 이 역시 취미가 주는 즐거움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평소 연필 관련 서적과 오래된 카탈로그를 읽고 정리하는 과정도 그에게는 수고가 아닌 즐거움이다.

연필을 고르는 기준은 단순히 오래되거나 희귀한 것이 아니다. 흑심의 품질은 물론 제조사의 특별한 의도나 당시의 역사·문화적 배경까지 살핀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생산된 빈티지 연필에 매료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제작된 연필에는 전시 상황에 따른 자원 절약 규제나 전쟁 선동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런 이야기들을 공부하다 보면 연필이 단순히 쓰는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연필 애호가들 사이에는 ‘나쁜 연필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박 씨 역시 모든 연필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가장 아끼는 연필을 꼽아달라는 질문에는 독일 파버(Faber)의 ‘폴리그레이드(Polygrade)’를 소개했다.

19세기 말 제작된 이 연필은 당시 최고급으로 평가받던 알리베르 광산의 흑연을 사용했다. 프랑스인 장 피에르 알리베르가 발견한 광산의 흑연은 높은 순도로 명성을 얻었으며, 파버는 이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해 연필 시장에서 입지를 넓혔다.

“100년 전에 만든 연필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필기감일까 그게 궁금한 거죠. 저는 연필을 단순히 바라보기 위해 수집하지 않아요. 원래 쓰라고 만든 물건이니까요. 웬만한 빈티지 연필은 한 자루씩 깎아서 써봅니다. 다만 폴리그레이드 연필만은 아직 깎아보지 못했네요.”

▲박용범 씨가 수집한 연필들.
▲박용범 씨가 수집한 연필들.

사람을 잇는 매개체

박용범 씨는 회원 약 500명이 활동하는 네이버 카페 ‘연필과 친구들’을 운영하며 연필 애호가들과 교류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이상 정기 모임을 열고, 각자 수집한 귀한 연필을 가져와 직접 써보기도 한다. 모임에서는 서로의 일상보다 연필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연필 수집 초창기에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연필, 오래된 연필을 수집하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꼈다면,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내가 가진 것, 내가 느꼈던 희열을 기꺼이 공유하고 경험을 나누는 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연필을 통해 나의 일상과 다른 일상의 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 역시 큰 즐거움입니다. ‘연필과 친구들’ 사람들과 지식과 감상과 이로움을 나누는 일 자체가 제겐 특별한 경험이고 연필이 맺어준 가장 큰 보람이자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바자회 같은 나눔 행사를 자주 했는데, 그런 인연을 계기로 관계가 더욱 깊어졌고, 이 적막한 우주에 내 편이 있다는 안도감마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내와 딸도 연필 수집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평생 다 쓰지도 못할 연필을 그렇게 많이 모아서 무엇 하겠느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취미를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있다. SBS ‘생활의 달인’ 출연 역시 가족의 격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박 씨는 “결국 취미의 완성은 사람”이라면서 연필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연필을 ‘사랑의 작대기’라고도 표현한다.

박 씨는 연필 수집이 자신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취미를 통해 얻은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분명하다. 건축설계라는 직업적 영역에서는 만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었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권태로움과 허무함도 덜어냈다. 무엇보다 연필을 매개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발견했다. 그에게 연필은 건조한 삶에 윤활유가 돼준 존재였다.

그렇다고 행복의 중심이 연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며, 일에서 얻는 보람도 크다. 연필 수집은 여기에 또 다른 즐거움을 더해주는 취미다.그는 반려동물처럼 마음을 의지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연필을 ‘반려사물’이라고 표현했다.

“연필은 행복의 조력자라고 생각해요. 카페에 흐르는 배경음악 같은 존재죠. 카페에 가는 이유는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평온한 휴식과 설렘이 묻어 있는 공간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이지 카페에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잖아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음악이 흐르지 않는 카페테리아를 상상하기 어렵죠. 연필은 항상 제게 연필 그 자체의 즐거움보다도 제가 행복을 만끽했던 시간을 가교해 주었던 조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고독을 채우는 취미의 힘

중년 이후 수집을 취미로 갖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박 씨는 그 이유로 ‘존재적 고독’을 꼽았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에너지를 쏟지만, 나이가 들수록 생활의 중심이 가족과 생계로 옮겨가고 활동 범위도 좁아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때 자신만의 취미가 삶의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취미가 있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행복은 어떤 취미를 가졌느냐보다 삶을 바라보는 마음과 태도에 더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만의 취향이 있다면 행복을 발견할 기회도 많아질 수 있다고 본다.

“중년 이상은 연필 수집이든 뭐든 혼자서도 즐길 수 있고, 함께하면 더 즐거운 취미를 가지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지적 탐구가 동반되는 취미라면 더욱 좋겠죠. 평생 해온 일과 전혀 다른 분야를 즐겁게 공부하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자연스럽게 부지런해져요. 고독할 시간은 없고, 고독을 채울 시간만 남는 거죠.”

박 씨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예로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강조했고, 쇼펜하우어는 고독을 즐길 줄 아는 능력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찾았다. 얼핏 상반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박 씨는 이를 같은 종이의 양면이라고 해석했다. 혼자서도 즐겁고, 함께하면 더 즐거운 취미가 있다면 두 가지 행복을 모두 누리는 앙상블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박용범 씨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 지금까지 모은 연필을 누구나 자유롭게 구경하고 직접 써볼 수 있는 카페를 여는 것이다. 건축가인 만큼 공간도 직접 설계하고 싶다. 꽃산딸나무와 별목련이 심어진 중정, 그곳을 통해 실내로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살, 선선한 바람이 오가는 공간. 방문객에게는 즐거움을, 자신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선사하는 도심 속 작은 오아시스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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