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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이 사라진 그날, 중년의 자기소개법

입력 2025-09-22 07:00

[강원국의 어른 소통법] “날개를 활짝 펼 시간이다”

새 책을 출간하면 ‘저자와의 대화’ 자리를 갖는다. 이런 행사는 주말에 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평일 오후에 한다. 참석자는 대략 30~40대 여성 독자가 대부분이다. 강연이 끝나면 질의응답과 저자 사인회 시간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신간 ‘강원국의 책쓰기 수업’ 출간 기념행사에서 딱 한 명 있는 남성 참석자가 질문을 했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그 남성분에게 사회자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분께서 다니는 데가 없거나, 하는 일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쉰 살쯤 직장에서 밀려나 백수가 됐을 때, 나는 두문불출했다. 일과 시간에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 사람 놀고 있나 봐’라고 수군거릴까 봐 그랬다. 일이 있을 때면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행 일을 보고 동사무소에도 갔다. 그 시간에는 직장인들도 길거리로 나오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됐다. 불편하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당시 가장 두려운 질문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였다. 하는 일이 없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그 어디’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이런 말을 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하다. 모든 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사람은 이미 강하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위고는 사는 데가 어디든 그곳에 굳건히 뿌리내리라고 요구한다. 나아가 전 세계를 타향으로 여기는 세상의 이방인, 세계시민이 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나는 미숙아였다. 초등학교 다닐 적부터 익숙한 자기소개, ‘**초등학교 *학년 *반 *번 강원국입니다’에 길들여 있었다. 틀에 박힌 어조로 자신을 소속으로 대체했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출판사에 출근하게 됐다. 여직원 4명에 남자는 사장과 나뿐인 회사였다. 평사원으로 출근한 첫날, 전 직원 앞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소개 시간이 끝나자 가장 나이 많은 여직원이 잠깐 할 얘기가 있다고 나오라고 했다. 그녀를 따라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가 쏘아붙였다.

“앞으로 그렇게 말 길게 하지 마세요. 아무도 듣고 싶은 사람 없어요. 들어보니 좋은 데도 다니고 하셨던데, 여기가 무슨 인생 이모작하는 덴 줄 아세요?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하지만 나는 만만해서 그곳에 간 것도, 또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었다. 갈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어디를 다니는 사람’으로 살았고, ‘그 어디’가 나의 정체성이었다. 출판사에 간 것도 어딘가에 다니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였다.

‘그 어디’가 없어도 사람들에게 나를 알리고 싶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 서술 방법 4가지에 맞춰 스스로를 탐색했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연보 작성을 시작으로 내 생애를 연대기 순, 다시 말해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했다. 어디서 태어나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디에 들어가 어떻게 살았다는 식이다. 거기에는 갈등과 시련, 위기의 시간이 있었고, 환희의 순간도 있었다. 삶의 굽이굽이에 복선과 반전과 역전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아, 이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고, 클라이맥스는 이때였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나를 둘러싼 인물을 중심으로 나에 관해 알아보는 방식이다. 부모와 자녀, 배우자, 직장 선후배, 친구, 친척, 스승 등 나와 관계되는 사람을 통해 나의 과거를 복원하는 ‘기전체(紀傳體)’ 서술법이다. 주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가까운 사람 세 명의 총합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돌아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내 인생의 무대에 등장했다. 시시때때로 악당이 출몰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우군과 은인이 나를 도왔다. 어찌 보면 나는 그 사람들의 집합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다. 굵직한 사건 20~30개를 골라 그것이 일어난 배경과 경위, 그 결말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개별 사건에서 느낀 점과 배운 점, 그리고 그 사건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 등을 따져봤다. 내가 손해 본 경험보다 얻은 게 훨씬 많았다.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떠올리기 싫은 경험을 반추해봄으로써 그 경험과 화해하는 덤을 얻기도 했다.

네 번째는 주제별로 내 인생을 정리하는 ‘강목체(綱目體)’다. ‘사랑’, ‘우정’, ‘배움’, ‘생업’, ‘가족’ 등으로 정리했다. 이들 분야별로 자산과 부채를 따져보니 결국 남에게 신세만 지고 갚지 못할 빚만 남긴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을 마감할 때 ‘미안하다’, ‘고마웠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탐색하는 방법이 역사 서술 방식만 있는 건 아니다. 일기 형식으로 독백하듯 자신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편지체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도 있으며, 어느 누군가와 짝을 이뤄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답하는 인터뷰를 진행할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의 생애를 적는 행장(行狀)을 쓰듯, 유언을 남기듯, 기자가 언론 부고 기사 쓰듯 자신을 되돌아볼 수도 있다. 필력이 된다면 자전적 소설이나, 실제 경험과 허구를 결합한 오토픽션 형태의 글, 체험 수기 같은 글을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나는 누구인가’를 묻자

어떤 방식이 됐든 과거 사람과 재회하고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질문과 탐문이 필요하다. 나는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인가?’, ‘가장 고마운 사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을 꼽는다면?’,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아흔을 훌쩍 넘긴 아버지와 학교 동창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얘기는 듣고 보니 기억이 났고, 금시초문인 얘기도 많았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네’ 이렇게 얘기 나누는 시간은 그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앞선 애도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탐색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자기소개에 나는 세 가지를 담는다. 나의 스토리, 역량과 콘텐츠, 개성과 이미지다. 스토리에는 내 얘기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의 얘기, 살아온 얘기만이 아니라 살아갈 얘기도 넣는다. 그러니까 나의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포함한다. 했던 일만 넣는 게 아니라 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한 일, 성공한 일만 아니라 실패한 일도 넣는다.

역량과 콘텐츠는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고, 자신 있는 분야나 주제다. 내 콘텐츠는 ‘글쓰기’, ‘말하기’이며, 이것으로 강의하고 방송하고 책을 쓰는 역량이 있다. 또한 그런 일이 즐겁고 보람 있다.

개성과 이미지는 한마디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수집과 모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양적 확대를 갈구한다. 지식, 정보, 관계 등 그 무엇이든. 동시에 모방을 통해 질적 향상을 추구한다. 누구처럼 되고 싶고, 누구를 본받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그 사람 수준에 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또한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다. 부응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초조하다. 늘 기대에 못 미쳐 아쉽고 후회된다. 그래서 겸손을 가장해 나에 대한 남들의 기대치를 낮추려 안간힘을 쓴다.


미래를 설계하는 자기소개

자기소개를 하는 건 과거의 반추에 있지 않다.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겸허하게 반성하고 더 나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다. 자기소개를 해본 사람은 안다. 자신의 어디가 문제이고, 무엇을 보강해야 하는지. 내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말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말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 하나는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세상에 적응하고 뿌리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쉰 살 무렵 뿌리가 뽑혔다. 비로소 날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즈음 문득 가수 임재범의 ‘비상’이란 노래를 듣고, 가사가 가슴에 꽂혀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묻자. 직함이 없다고 작아질 필요는 없다. 관심과 지향을 중심에 두고 답하면 된다. ‘무엇이 되고 싶다’보다 ‘어떻게 살아가겠다’로, 남이 부여한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의 자세와 가치로 승부하면 된다.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내 삶의 일부로 당당히 품어야 한다. 중년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경험은 결코 녹슬지 않는다. 여전히 성장하면 된다. 지금까지 땅에 뿌리내리는 시간이었다면, 이제 자신의 날개를 펼칠 시간이다. 감춰뒀던 날개를 활짝 펴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우리 이제 훨훨 날아보자.


중년의 자기소개 주안점

➊ 성취가 아니라 성장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젊은 시절 아무리 빛나는 성취를 이뤘더라도, 그런 성취를 통해 아무런 성장도 이루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➋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에 방점을 찍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얘기해야 한다.

➌ 실패 극복 이야기를 통해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실패는 성공의 디딤돌이다. 거기서 우러난 삶의 지혜가 중년의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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