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관계, 배움, 참여에서 찾은 힌트

나이 들고 생활이 달라져도 자기 삶을 좋아하며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 다를까. 장수학자로 유명한 박상철 전남대학교 연구석좌 교수가 연구 현장에서 만난 백세인들에게는 곁에 있는 사람과 자신이 할 일이 있었다. 박상철 교수에게 행복을 물었더니 “행복은 내 삶에 대한 결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지금도 연구하고 강연하며 바쁘게 지낸다. 자신이 가진 것을 후배들에게 빨리 나눠주고 싶다는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연구 현장에서 만난 노인들도 그랬다. 그들의 삶에서 박 교수는 행복을 발견했다.
산 너머 친구와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
박 교수는 “백세인 연구를 하면서 만난 강원도 화천의 두 어르신이 잊히지 않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두 분은 98세였는데, 산을 사이에 두고 왕복 여섯 시간 거리에 살고 계셨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산을 넘어가 한 시간 정도 함께 있다 오신다는 겁니다. 그 먼 길을 가서 한 시간만 있다 오기에 만나면 뭘 하시냐고 물었어요. ‘하기는 뭘 해. 가만히 있다가 오지’라는 대답에 놀랐습니다.”
박 교수는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엇을 하지 않아도 함께 앉아 있을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꼈다고 했다.
그가 행복의 조건 첫 번째로 꼽은 것도 관계였다. 돈을 쓰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느끼는 즐거움은 가까운 사람의 말 한마디에 사라지기도 한다. 배우자·자녀·이웃·친구와 편안하게 지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이 들수록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깊은 관계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내가 편해야 행복해지는 거예요. 가까운 사람부터 중요한 겁니다.”
그 역시 가족 안에서 이를 경험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은 어머니가 부쩍 약해지는 것을 보며 곁에 머물고 싶어 당시 일하던 대구를 떠나 전남대학교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오랫동안 노인을 연구해온 그가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 한 일도 시간을 내 곁에 머무는 것이었다.
내가 있어 사람들이 이어진다면
박 교수는 장수 연구 초기부터 가족학·사회복지학·인류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와 함께 현장을 다녔다. 가족의 사정과 살아온 환경을 알아야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같은 노인을 만나도 연구자마다 주목하는 대목이 달랐다.
그는 얼마나 오래 사는지와 함께 무엇을 하며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지 살폈다. 그가 말하는 ‘역할 수명’이다. 수명이 길어져도 자신이 할 일이 사라지면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는 기간과 역할을 갖고 사는 기간이 삶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이 그가 바라는 노년이다.
여기서 역할이 꼭 직업이나 사회적 직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가 만난 백세인 가운데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텃밭을 가꾸거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각자의 몫을 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노인의 중요한 역할로 ‘연결고리’를 꼽았다.
“그분이 있음으로써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겁니다. 가족과 주민, 외부 사람들까지 연결해줄 수 있죠.”

제주에서 만난 백세 할머니는 동네 30~40가구의 제삿날과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할머니를 마을 사람들을 잇는 존재로 보았다. 누군가의 집안 사정을 알고 오래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에 의미가 있었다. 사람을 연결하는 힘은 평생 쌓아온 경험과 관계에서 나왔다.
박 교수는 노년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성과만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일하고 사람을 겪으며 얻은 지식은 젊은 세대가 곧바로 갖추기 어렵다. 가족이 모일 이유가 되고, 이웃의 사정을 헤아리며, 필요한 사람에게 경험을 전하는 일도 역할에 들어간다.
“배워야 역할이 생겨요”
박 교수는 은퇴 후에도 과거의 직함과 일하는 방식에 매달리면 새로운 역할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세상은 달라지는데 예전에 배운 것만 고집해서는 참여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은 “하자, 주자, 배우자”다. 세 가지 가운데 핵심은 ‘배우자’에 있다. 일단 배워야 할 것도, 줄 것도 생긴다는 생각에서다.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했더라도 배우기 시작하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길 수 있다. 배운 것을 어디에 쓸지 미리 결론 내리느라 시작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새로 배우는 일이 누구에게나 반가운 것은 아니다. 몸을 움직이거나 배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는 일단 시작해보기를 권했다.
“‘이 나이에 배워서 무엇을 하겠나’라는 생각이 앞서면 배울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 하다 보면 할 일이 생긴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추진했던 ‘골드쿡’은 65세 이상 남성을 대상으로 직접 요리하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배우자나 자녀에게 식사를 맡기던 사람이 자기 밥을 지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건강 교육과 은퇴 준비 프로그램도 같은 취지였다. 그는 이런 활동을 ‘노인 독립운동’이라고 불렀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려 생활의 주도권을 갖고, 그 안에서 역할과 행복을 찾도록 하려는 것이다.
취미를 권할 때도 직접 만들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무게를 뒀다. 배운 기술을 발전시키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퇴하면 직장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났던 사람들과의 접점이 줄어든다. 함께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나이나 직함에 기대지 않고도 어울릴 수 있다. 활동의 크기보다 자신이 참여하고 보람을 느끼는가가 중요하다.
그는 건강과 경제적 안정도 삶의 만족을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짚었다. 먹고사는 압박을 받으면 생활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관계와 참여가 중요해진다. 남과 비교해 만족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경계했다. 다른 사람의 부와 생활을 기준 삼으면 자신의 일상에 만족하기 어렵다. 그의 관심은 남보다 얼마나 가졌는지가 아닌,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있다.
나누고 싶은 것 많아
박 교수는 지금도 연구자들을 만나 토론하며 강연을 다닌다. 오래된 연구를 정리해 후배들에게 건네는 일에도 시간을 쓴다. 어떤 질문에서 연구가 시작됐고,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이 가진 자산이라고 했다. 현재의 결과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과정을 다음 연구자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와 강연 요청에 응하는 이유도 자신이 겪고 알아온 것을 많이 나누고 싶어서다. 20여 년 전의 현장과 지금을 비교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겨야 할 자료와 정리해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다급해진다.
“자료도 엄청난데 아직 정리가 안 된 게 많아요. 매듭짓지 못한 것도 많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빨리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내가 준 걸로 연구할 생각을 하면 행복해지죠. 많이 나누고 싶어요.”

그는 새로운 도구를 배우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요즘은 인공지능(AI)을 자료 수집과 연구 정리에 활용한다. 기초 자료를 모으는 시간을 줄여 자신이 해야 할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생 해온 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고, 정리한 것을 후배들과 나눈다. ‘배우자’와 ‘주자’를 자신의 일상에서도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행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는 분명했다.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밤, 후배들과 연구에 관해 나누는 대화, 자신이 아는 것을 전하는 자리였다. 산 너머 친구를 만나 가만히 앉아 있던 두 노인의 시간도 그가 오래 기억하는 행복의 모습이었다.
함께 있을 사람이 있고, 내 몫으로 할 일이 있고, 아직 나눌 것이 남아 있는 생활. “행복은 결과”라는 그의 말은 그 생활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