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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3 홀이라고 드라이버 잡지 말란 법 있어?

기사입력 2021-11-29 08:49

[김용준 프로의 골프 레슨]

비가 그치더니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그래도 태풍 뒤끝이라 바람은 말도 못 하게 세게 불었다. 아마추어 제자들과 라운드한 그날 뱁새 김용준 프로는 첫 네 홀에서 선방했다. 강풍에 순응하며 전부 파를 기록한 것이다. 이어서 맞이한 5번 홀은 파3로 215m였다. 맞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김 프로는 일단 3번 우드를 들고 티잉 구역으로 올라섰다. “드라이버를 잡아야 할까요?” 캐디를 바라보며 그가 혼잣말처럼 작게 물었다. “저기 저 큰 태극기가 다 펴질 정도로 바람이 세면 네 클럽 더 봐야 한대요.” 김 프로 얘기를 들었는지 아니면 마땅히 해야 할 얘기라서 그랬는지 성격이 밝은 캐디가 조언했다.

캐디가 가리킨 쪽에는 폭이 얼마나 큰지 가늠도 안 되는 초대형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대주주의 국적이 외국이라 한동안 우리 국민에게 미움을 산 회사가 물류센터에 세운 것이었다. 여태 본 것 중에 제일 큰 태극기를 내걸어서라도 기업 이미지를 바꿔보려는 꾀를 낸 것이려니 하고 김 프로는 짐작했다. 아차 얘기가 딴 데로 샜다. 다시 맞바람 속 긴 파3로 돌아가자. ‘흠, 그렇다면 250m쯤 쳐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김 프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파3에서 드라이버를 잡는다는 것은 좀 그렇지?’ 어줍잖게 프로 골퍼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듯했다. ‘3번 우드로도 250m를 칠 수 있다’는 데 그의 생각이 미쳤다. ‘그래, 강력한 우드 샷을 보여주자’라고 그는 마음먹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클럽을 휘두른다고 휘둘렀는데 볼은 페널티 구역으로 날아갔다. 너무 세게 치려다가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크게 슬라이스를 낸 것이다. 벌타를 받고 110m 지점에 드롭했다. 강한 맞바람에 8번 아이언으로 세 타째 샷을 했다. 볼은 핀 왼쪽 뒤 프린지로 떨어졌다. 내리막 짧은 어프러치가 남아 여차하면 더블 파를 기록할 판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살피더니 느긋한 어프러치로 깔끔하게 핀에 붙였다. 그래도 더블 보기. 그는 후회했다. ‘이런 똥멍청이 같으니라고. 자존심이 스코어 카드에 기록되냐고? 스코어가 자존심이지.’

바람에 고전하며 그는 어느덧 17번 홀에 이르렀다. 185m짜리 파3였다. 블랙티(보통 프로 골퍼나 아마추어 중에서도 핸디캡이 아주 낮은 플레이어가 치는 티)가 화이트티와 같이 놓여 있었다. “흐흐, 코스 세팅이 아주 합리적이네요.” 김 프로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추어 제자들 입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앞 핀이라 175m 정도 보면 적당했다. “170m네요.” 거리측정기로 재본 제자가 말했다. 내리막을 감안한 숫자일 터. 물을 건너야 하고, 그린 앞에 키 높이 벙커가 있는 홀이라면? 경험상 내리막을 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는 여전히 강한 맞바람이었다. 몇 클럽을 더 볼 것인가? 아까 물에 빠뜨리고 더블 보기를 한 5번 파3 홀과 비슷한 강풍이었다. 그렇다면 네 클럽이나 더 길게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3번 우드로 쳐야 한다는 말인데?’ 김 프로는 또 망설였다. 그러다 마침내 우드를 잡아들었다. 제자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시원하게 샷을 날려놓고도 김 프로 역시 볼이 날아가는 동안 조마조마했다. 혹시 너무 크게 친 것은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웬걸. 볼은 기가 막히게 날아가다 오른쪽으로 살짝 밀리더니 툭 떨어져서 핀에서 여남은 발짝쯤에 섰다.



“굿 샷”이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제자 차례다. 아마추어 중급자에게는 175m도 부담스러운데 맞바람까지 강하게 부니 여간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차례인 제자가 드라이버를 잡았다. “파3에서 드라이버를 다 잡네요”라며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쓴 다음 스윙을 했다. “굿 샷” 하고 캐디가 소리쳤다. 결과가 제법 좋았다. 약간 밀렸지만 거리는 딱 맞아서 오른쪽 프린지에 멈췄다. 다음 제자 역시 드라이버를 잡았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휘둘렀다. 두 사람이나 서너 클럽 길게 잡은 것을 봤으니 확신을 가질 만했다. 볼은 시원하게 날아가 그린에 멈췄다. 김 프로 볼보다 예닐곱 발짝 더 오른쪽에. 마지막 제자는 그린 앞 페널티 구역에 빠졌다. 차마 풀 스윙을 하지 못한 탓이리라. 온 그린 시킨 제자가 파를 하면서 김 프로가 그 홀 상금을 독식하는 것을 막았다. 쩝.

몇 번으로 몇 미터를 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몇 번으로든 그 몇 미터를 쳐내는 것이 중요하지. 스코어 카드에 점수를 기록할 때 티 샷이 몇 미터 나갔는지 혹은 세컨드 샷은 거리가 얼마 남았을 때 몇 번 클럽으로 쳤는지 기록하던가? 독자는 부디 자존심을 세우느라 클럽을 잘못 선택하지 말기 바란다. 상황에 맞는 클럽을 선택해서 한 타라도 줄이는 것이 진짜 자존심을 세우는 비결이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김 프로도 클럽별 거리만 생각하다 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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