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 진통제 덕분인지 곧 안정을 찾았다. 간병하는 여사님이 자식보다 더 친절하게 아버지를 간병했다. 아버지는 나날이 좋아졌다.
가족들의 고민은 ‘언제 어떻게 이 병을 알려야 할까?’로 옮겨갔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게 맞다는 건 알고있었지만 병상에서 환히 웃고있는 아버지를 보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통증이 잡히면 집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고있는 아버지께 폐암3기고 여명이 2~3개월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결국 주치의에게 부탁을 했다. 의사가 아버지 상태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알려드리기로 했다. 오후 회진을 하며 폐암 3기라고 알려드리고 아버지 상태를 설명을 했다. 아버지는,
“처음 앓는 병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농담 어린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의사를 웃음 짓게 한 아버지는 그날 일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가 나왔다. 폐암 삼기라고 한다. 심정은 담담하다.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혼란스럽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아버지 일기를 보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날 이후 우리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일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호스피스병원과 아버지 장례식, 장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대화를 계속 했고, 온전한 정신으로 남은 가족들과 작별인사을 했다. 재산도 없이, 건강을 잃은 채 오랜 시간 병든 노인으로 살아 온 아버지를 그저 그런 노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태도에 존경심이 생겼다.
아버지를 보면서 죽음이 슬프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죽음 때문에 슬프거나 힘들어하지 않으니 지켜보는 가족들도 아버지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게 크게 슬프지 않았다. 죽음이 슬픔 건, 죽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죽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슬픈 거라는 법륜 스님 말이 깊이 이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