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숲] 충북 괴산 청천면 화양구곡길
맵찬 추위 때문이겠지. 길 위에 인적이 끊겼다. 산과 산 사이 길에 적막감만 흥건하다. 풍광은 곳곳마다 수려해 미학의 경연을 펼친다. 티 없이 미끈한 기암과 정교한 단애, 백색 비단을 치렁치렁 휘감은 양 하얗게 얼어붙은 냇물, 거기에 나목들이 수묵을 입히고 솔숲이 초록을 칠하니 가히 가작이다. 저마다 자신들의 살과 뼈를 재료로 써 화폭을 채운 게 아닌가. 길을 덮은 포장재와 몇몇 상점들이 이물감을 자아내지만 그건 시야에서 걷어내면 그만일 일. 발길에 탄력이 붙는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화양동 일대에 전개되는 아홉 군데 승경을 일컫는다. ‘곡(曲)’이란 일테면 자연 속의 정원이다. 원본은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주는 주자(朱子). 주자는 무이구곡을 노닐며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구가했다. 이 주자학파의 충실한 당원이었던 조선의 거유(巨儒)들도 무이구곡을 본 삼아 흔히들 ‘곡’을 꾸렸다. 그들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엔 청산에 은거해 무욕의 노년을 누리는 게 선비의 도리라 여겼다. 때가 되면 낙향을 했다. 감흥이 돋는 경승지에 ‘곡’을 조성해 공부와 음풍영월을 병행했다. 화양구곡의 경영주는 우암 송시열이다.
고요한 길을 걷자니 안심이랄까, 허심이랄까, 모처럼 평온해진 마음을 자각한다. 헐벗은 겨울나무 숲을 바라보자니 짠하여 애틋하나 알고 보면 정말 짠한 건 나의 진상임을 자각한다. 맥락 없이 엄습하는 자괴감이 싫지만, 그러나 이 순간 나는 나로 돌아온 셈이다. 헌걸찬 바위벼랑에 굳세게 선 소나무의 내심엔 무엇이 들었을까? 메마른 절벽 끝에서 기어이 견디는 일, 살아남는 일. 미친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폭풍 속을 항해하는 어부의 위험이 이보다 더할까.
초록은 어디서 건져오는가? 차고 흐린 겨울 하오에 눈부신 초록을 뿜는 솔이 경이롭다. 저 요동치는 초록을 보라. 잎잎이 낱낱이 기적이지 아니한가. 초록이라곤 미세한 기미조차 없는 이슬과 빛과 바람을 움켜쥐고서 소나무는 초록을 토한다. 지수화풍을 능히 거머쥐는 실력과 전략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창의가 아닐 수 없다. 바위틈에 틀어박은 실낱같은 잔뿌리 하나하나마다 용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생존이니 찬연하다.
계곡을 건너 숲으로 스며드는 뱁새 한 마리는 또 어떠한가. 놈은 옷을 지어 입을 방법이 없으니 그냥 맨몸으로 산다. 태어날 때 걸치고 온 한 벌 털옷만으로 혹한을 견딘다. 단지 나뭇가지 하나나 마른 덤불을 집삼아 겨울밤을 보내며, 새벽이면 부리나케 깨어 명랑하고도 낙천적인 노래를 부른다. 세찬 날개를 펼쳐 거침없이 허공을 비상한다. 산야의 얼음 같은 겨울을 사는 뱁새의 생의(生意)에서 또 느낀다. 그 완벽한 자립을. 그 고독한 자유를.
화양구곡의 절승은 아무래도 암서재(巖棲齋) 일원이다. 암서재는 냇가 숲속에 세워진 아담한 조선 정자. 기묘하게 늘어서거나 솟거나 겹친 바윗장 틈서리에 들어앉은 우암의 서실이다. 우암이 세상의 풍파와 겨루었던 항해일지는 영광과 파란의 이중주로 점철되었다.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정쟁의 회오리 속에서 살았던 그는 결국은 임금의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우암의 사후 이곳 화양동엔 그를 사액한 화양서원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화양동은 정치적 불나방들의 소굴로 둔갑했으며 각축과 폐단과 착취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매천 황현이 화양서원의 건달들을 일컬어 ‘서민들의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이라 했을까. 대원군조차 화양동을 말을 탄 채 진입했다고 해서 유생들에게 패대기를 당했다.
오늘따라 미세먼지가 짙다. 유목민처럼, 난민처럼 허공을 떠도는 저 누런 혼돈. 산림에 들어와서조차 미세먼지를 들이마셔야 하다니. 황당무계한 현실이지만 자연을 거스른 문명의 야만이 불러들인 필연이다.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저 카오스.
탐방 Tip
널리 알려진 관광지구이지만 사람 드문 겨울엔 호젓하게 걸을 만하다. 숲과 기암과 물의 하모니를. 눈 내리면 사진가들이 일부러 찾아든다. 우암의 유적지로는 암서재, 화양서원, 만동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