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정원 순례] 청주시 마야사 정원

정원의 입구 한 모퉁이가 유독 환하다. 감나무에 다글다글 매달린 주황 감들로 연등을 밝힌 양 화사하다. 작은 절 마야사가 통째 부처의 법음을 두런거리는 대형 연등에 해당하겠지만, 가을이 절정에 달한 날엔 감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신은 말하고 싶은 진리를 어디에 숨겨놓은 게 아니라 모조리 인간의 눈앞에 두었다던가. 매사 감 잡을 줄 아는 달인이라면, 감들이 뿜는 저 휘황함만 보고도 감을 다 잡고 삶의 무한한 희열을 노래하리라.
마야사는 수행자의 본이 되는 면모가 여실해 알아보는 이 숱한 현진 스님이 13년 전에 창건했다. 꽃과 나무들이 모여 사는 정원도 함께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민간정원은 절의 구색을 위한 치레? 심심파적으로 꾸민 스님의 취미 공간?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불국(佛國)이며, 그 진정한 주인은 정원이다. 현진 스님의 얘긴 이렇다.

“요즘은 종교보다 꽃과 나무가 사람들에게 더 각광을 받습니다. 정원이 종교보다 더 큰 기여를 합니다. 종교가 주지 못하는 위로와 희망을 부여하는 거예요. 미래엔 정원이 종교의 자리에 오를 게 분명해요.”
현실의 종교가 필요 없단 뜻은 아니다. 자연의 등가물이자 대리인인 정원의 가치가 세속화한 종교보다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행진하는 추세를, 그 막대한 긍정적 가치를 가리키는 언설이다. 스님이 바라는 건 종교와 자연의 공존이다. 그러나 정원을 예찬하는 데에서 나아가 세상의 성스러운 뿌리쯤으로 읽는 그의 심중은 이미 자연으로 가득하다. 자연을 팔만대장경에 맞먹을 지혜와 사랑과 자유자재를 배울 수 있는 묘법의 저장소로 본다. 정원을 세상에서 가장 믿고 기댈 만한 하나의 경전으로 여긴다. ‘그대여, 모름지기 마야사에선 정원을 경전으로 읽고 돌아가라. 그 전과 후가 다를지니.’ 스님의 메시지란 대략 그런 것일 터다.

우리는 보통 정원에서 시각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만족한다. 꽃의 순결한 자태와 나무의 청명한 푸름에 마음 한 자락 내려놓고 편하게 쉬어 간다. 아귀다툼과 꿍꿍이가 난무하는 도시의 사각 링을 벗어난 정원에서의 쉼. 슬픔과 아픔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정원 풍경의 순정한 아름다움. 그것만으로도 정원은 고마운 공간이다.
그러나 현진 스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꽃과 나무의 내면을 만나라고 권한다. 더 깊게 꽃을 바라보고, 더 오래 나무를 지켜보라 한다. 그러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전과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라고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을 수행 도량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일으켜 삶이 부과하는 난제를 해결하라고. 하늘이 내리는 햇빛과 물만 먹고도 잘 사는 정원수들의 태연자약을 내 안에 끌어들여,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한없이 경박한 물신의 사슬을 끊어내라고.

마야사는 그지없이 단아한 절집이다. 대웅전, 지장전, 석상 몇 점 등속이 단출하게 어우러져 아취를 자아낸다. 정원 역시 군더더기 없이 정결하다. 절제와 균제를, 센스와 위트를 배합해 조화로운 공간을 연출했다. 볼 것 많지 않은 소정원임에도 오래 머물게 하는 흡인력을 행사한다. 현진 스님의 도력과 성정을 직감할 수 있는 모양새다.
공간 중앙부엔 너른 잔디밭이 있다. 바람이 지나가고 낙엽이 구르며 잔디들의 낯을 간질인다. 잔디밭 둘레엔 나무들을 듬성하게 배치했을 뿐이다. 나무들의 존재감을 고려하는 한편 여백을 살리는 데도 방점을 둔 구성이다. 전체적으로 미니멀 아트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조경을 구현했다.

조경의 기획과 식물의 식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현진 스님의 숨결과 손길로 이루어졌다. 잔디밭 구역은 물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마야동산’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눈과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묘목 상태의 단풍나무·목련·매화·라일락·병꽃나무·모란·칠자화 등을 사다 심고 가꾸었으며, 세월이 합세해 은성한 꽃을 피우게 했다. 먼 곳에서 노목을 옮겨 오고, 신령한 나무를 모셔 오는 식으로 열렬한 ‘식물 집사’의 역할을 빈틈없이 해냈다. 날이면 날마다 호미를 손에 들고 살다시피 했다. 밥만 축내는 공허한 수행보다, 흙을 만지고 나무와 화초를 돌보는 일을 상책으로 삼고 살았다. 다시 말해 조경이 수행이었다. 꽃과 나무가 경전이었다. 이런 그가 유심히 눈여겨보라고 추천하는 곳은 잔디마당이다. 너른 마당의 여백을 보라는 얘기다.
“일부러 텅 비다시피 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불교의 요체인 ‘공(空)’의 개념을 시각화한 곳이지요. 저 맑은 공간에서 밝은 평화를,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만물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게 ‘공’ 사상이다. 다만 ‘비어 있음’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용하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돌아가는 게 삼라만상이다. 진공묘유를 고(故) 법정 스님은 ‘텅 빈 충만’이라 했는데, 현진 스님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비워야 채워지며, 진정으로 비울수록 충만에 이른다는 것!
문제는 누구나 비움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말과 생각에 그치기 십상이라는 데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진심으로 비울 수 있단 말인가. 스님의 답은 이렇다. “자연과 정원에서 배우라!” 이를테면 서슴없이 나목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저 가을 나무들의 동향을 주시하라는 얘기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기쁜 춤을 추듯이 팔랑거리며 추락하는 낙엽들. 소멸의 환희를 표하는 낙엽들의 해탈. 머리에 새겨지는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