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전라도 도명(道名) 제정 천년
올해는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정해진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1018년, 즉 고려 현종 9년에 중앙관제와 함께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했었다. 당시 전국을 5도 양계(서해도·교주도·양광도·전라도·경상도, 북계·동계)로 편제하면서 강남도(금강이남의 전북)와 해양도(전남, 광주)를 합쳐 전라도라 명했다. 해당 지역의 큰 고을이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할 때 나주목(牧)이 된 이래 조선 말까지 900년 남짓한 기간 전남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광주도 그때까지는 나주에 딸린 군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주둔하고 있을 때 만난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 씨의 고향이니 고려 2대 임금 혜종의 외가인 셈이다.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군의 2차 침입 때는 왕이 나주로 피난을 가며 열흘 남짓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런 '천년 목사 고을'이기에 나주를 첫 답사지로 정하고 나주읍성(사적 제337호)을 가장 먼저 찾아봤다. 아쉽게도 성벽 대부분이 훼철되어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동·서·남·북 4개소에 있던 성문은 북문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된 상태다. 읍성의 중심인 목사가 집무하던 관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채 관아문 정수루(正綏樓)만 남아 있었다. 그 옆으로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錦城館)과 목사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金鶴軒)이 오롯하다.
나주목 객사와 금성관
객사(客舍)란 고려~조선시대 때 매월 초하루와 보름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신 공간이기도 하다.
나주 객사의 정청은 금성관(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정문에서부터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의 3개 문을 거쳐 들어간다. 현재는 금성관 좌우로 날개처럼 이어진 건물인 동익헌과 서익헌 그리고 중삼문과 정문인 망화루가 복원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금성관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나주목사 이 유인이 정문 망화루와 함께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목사 김개에 의하여 중수되었고 이후 고종 때 다시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군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파괴됐는데, 1963년과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익헌과 서익헌은 2004~2008년에 복원하였는데 동익헌은 서익헌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다. 전라도 관찰사 이행(1403~1404년 재임)이 벽오헌(碧梧軒)이라 이름지어 정청과는 별도의 현판을 달았다. 동익헌에서는 요즘 각종 공연이나 발표회 등을 진행하고 있다.
공덕비와 비석군
나주 객사 담장 안쪽 한편으로는 수십 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다. 역대 목사(牧使)나 관찰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들이다.
방방곡곡 면(面) 단위에만 가도 공덕비 한두 개는 서 있으니 천년 목사 고을 나주에 세운 비석들이 만만치는 않을 터.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석이나 귀부의 생김생김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칭송받는 사람의 이름이 낯익어 반가운(?) 비석도 제법 보인다.
나주 금성관은 아직 부분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며, 추가적인 복원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료입장이며, 30분 남짓이면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다. 수시로 전통공연이나 음악회 등이 열리니 나주 탐방 시 가장 먼저 들려 볼 것을 권한다. 금성관 앞으로는 그 유명한 나주 곰탕거리로 서울까지 알려진 맛집들이 즐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