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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

기사입력 2018-02-09 11:42

▲미아리고개에 있는 구름다리 표석(박혜경 동년기자)
▲미아리고개에 있는 구름다리 표석(박혜경 동년기자)
필자가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돈암동이다. 당시 돈암동 랜드마크는 태극당이라는 제과점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할 때 ‘태극당 앞 몇 시’ 하면 다 통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규모도 상당히 컸고 빵도 맛있고 고급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자주 이용했으며 그땐 데이트도 제과점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중학교 때 필자는 전차 통학을 했다. 전차 종점도 태극당 바로 앞이어서 사람들도 많이 몰리는 장소였다. 요즘엔 성신여대입구역이 있어 명동 못지않은 복잡하고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태극당 제과점이 그 자리에 있지만 이전의 반 정도로 규모가 줄어서 아쉬운 느낌이다.

태극당에서 미아리 쪽으로 넘어가는 곳에 미아리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알고 있듯이 미아리고개는 ‘한 많은’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한때 지자체에서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이미지를 없애려 언덕 양편 축대 담벼락에 샛노란 개나리를 잔뜩 심어 개나리고개로 부르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언덕 양편에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져 있는 노랑 개나리가 매우 보기 좋았고 한 많은 미아리고개보다는 예쁜 개나리고개로 변신한 것이 즐겁기도 했는데 요즘은 아파트 공사가 많아서인지 봄이어도 개나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미아리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미아리고개였다. 한이 많다는 표현에서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가 짐작된다. 필자가 6·25 전쟁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퇴각하는 북한군이 우리나라의 고위인사나 죄 없는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갔는데 그때 이 미아리고개를 통해 넘어갔다고 한다. 끌려가는 가족을 이 언덕에서 가족들이 지켜보았다니 정말 단장의 고개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노랫말을 들어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

그러나 필자에게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픈 느낌만 있는 건 아니다. 중·고교 시절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면 삼류극장인 미도극장이 있었다. 동시상영 극장이었는데 한 번 들어가면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학생은 출입 불가였지만 변두리 극장이어서 무사통과가 가능했다. 영화보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이곳으로 자주 영화를 보러 갔다. “선도부 선생님 떴다!” 하면 화장실로, 계단 뒤로 도망다니기도 했던 짜릿하고 신나는 추억도 있으니 필자에겐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프기만 한 고개는 아닌 것이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돈암동 쪽에서 바라다보이는 미아리고개 왼쪽 언덕 위에 양옥집이 있었다.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고 소문이 나서 친구들도 모두 무서워했다. 그 집을 싸게 사들이려는 사람의 음모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언덕 위의 그 양옥집을 보면서 오싹함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양쪽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와 아리랑 아트홀이라는 문화공간도 생겼다.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바로 길음 뉴타운이 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유명 여고를 유치하는 등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이상 슬픈 동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필자가 수십 년 지나다닌 미아리고개가 한과 슬픔의 이미지를 벗고 더욱 발전된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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