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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재난통신, 서울의 3개 봉수대

기사입력 2017-12-05 16:05

▲눈 내리는 날의 안산 봉수대 (백외섭 동년기자)
▲눈 내리는 날의 안산 봉수대 (백외섭 동년기자)
사상 처음 수능시험이 연기될 정도로 큰 지진이 발생하였다. 우리나라도 지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럴 때마다 국민에게 얼마나 빠르게 위기상황을 알렸는지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첨단 문명기기를 손에 들고 살면서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서울 남산, 안산, 봉화산 3곳에 옛적 재난통신수단 봉수대가 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쉬운 나지막한 곳이다.

봉수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이었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국경의 긴급한 소식을 중앙이나 국경의 기지에 전하던 군사통신 방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봉수제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본격적인 국가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시대에는 체계적인 봉수제가 확립되어 전국적인 봉수망이 정비되었으나, 1894년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신호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를 조정하여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냈다. 한 번 드는 것을 일거라 하여 평상시에는 일거, 해상이나 국경 부근에 적이 나타나면 이거, 변경이나 해안 가까이에 적이 나타나면 삼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병선과 접전을 하면 사거,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을 하면 오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우선 위급한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었다. 특정인을 위하여 기밀이라는 이유로 숨기거나 해킹할 수단도 없다. 안개ㆍ비ㆍ바람으로 기후가 나빠 봉수가 불가능해지면, 포성과 뿔 소리로 인근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상황을 전달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 봉수대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

남산 봉수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대는 남산에 있는 5개소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었다. 동쪽의 제1봉부터 서쪽 방향으로 제5봉에 이르는 다섯 개의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도, 제2봉은 경상도, 제3봉의 봉수대는 평안도, 제4봉은 평안도, 제5봉은 전라도, 충청도에서 전달된 봉수를 받았다. 남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남산광장 북쪽 방면으로 5개가 나란히 있다. 관련 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안산 봉수대

안산은 서울 시내 중심에서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높이 295.9m 나지막한 도심의 산이다. 독립문역에서 바로 연계되는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이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 서울 무악 동봉수대-> 남산 제3 봉수대로 전달되었다.

봉화산 봉수대

흔히 아차산 봉수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서울 중랑구 묵동, 신내동 일대 봉화산 정상(160.1m)에 위치하고 있다. 봉화산 봉수대는 1994년 복원한 것이다. 옛날의 아차산 봉수는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남산 제1봉수로 연결되는 제1봉수의 말단으로, 양주의 한이산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1 봉수로 전달해주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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