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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런 봄바람에 매력자산 돋아나고 PART1] 매력의 외적, 내적 자산에 대하여

기사입력 2017-02-23 16:50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옷의 자리에서 사람을 보는 사회

사람이 털북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살갗을 다치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아가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해 거기에 맞는 옷을 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원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질기고 편하고 보기 좋은 옷을 입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사람인데 자기에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멋있는 옷을 골라 입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사람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마땅하고 사람다운 ‘옷 입는 일’이 그렇게 물 흐르듯 인간의 역사를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어쩌면 앞에서 서술한 흐름의 역류(逆流)라고 해도 좋을 법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옷 문화’는 참 서술하기도 복잡하고,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옷 입는 일에 대한 아무리 짧은 발언을 해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는 자리를 넓히기보다 오히려 불편하게 얽히고설키는 언짢음을 낳곤 합니다.


사람이 아닌 옷이 주체가 된 세상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옷 입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말들을 합니다. 이를테면 남자가 여자처럼 입었다느니(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늙은이가 젊은이처럼 입었다느니(이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감히 귀한 분 옷매를 흉내 낸다느니(반대로 자기가 언제부터 서민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아예 다 벗지 저걸 옷이라고 걸쳤느냐느니(반대로 아예 옷을 입었다 하지 말고 둘둘 감았다는 게 낫지~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1960년대 복고풍이라느니(반대로 우주시대 첨단 모습이라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품위가 돋보인다느니(반대로 속물처럼 보인다느니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하는 말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처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준거로 한 의상문화의 서술이 무의미하게 된 새로운 이른바 ‘패션담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담론의 준거가 무언지 가늠하기가 무척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유행’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이 무섭게 강한 규범적 가치로 누구나의 옷 입음을 판단하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새 패션 담론에 어울리지 않는 이전을 준거로 한 패션 서술이 얼마나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한데 그렇기는 하면서도 아직은 이런 묘사를 아주 접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준거로 하든지 어울림과 그렇지 않음을 통해 옷 입는 일에 대해 발언하는 일은 멈추지 않을 거니까요.

그런데 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런 ‘옷 담론’을 듣다 보면 ‘옷’과 옷을 입는 ‘사람’의 자리가 묘하게 바뀐 것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입은 옷’이 사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요즘 우리네 삶에서 ‘옷 입는 문화’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주체가 되어 사람을 드러내면서 그를 판단하고 설명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는 사실이 묘하게 저를 편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 불편함이 무언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할 ‘옷’ 입기

아무튼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고, 비싼 좋은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부귀하게 보이고, 이른바 멋스럽게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고, 후줄근하게 입으면 그 사람은 좀 모자라다고 판단되며, 꾀죄죄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오갈 데 없이 그 사람은 그만큼 너절하게 보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며 살고 있고, 그런 판단에 상당한 긴장을 하면서 옷을 입으며 살아갑니다. ‘옷을 통한 사람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현상은 유니폼 문화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좀 과장을 하자면, 특정한 기능 수행을 위한 제복이 마련되면서 그 자리에서는 그 유니폼을 벗는 순간 아예 그것을 입었던 사람조차 사라져버립니다. 존재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유니폼, 부귀하다는 유니폼, 멋있다는 유니폼, 때로는 타의에 의해 후줄근하고 꾀죄죄하다고 여겨지는 유니폼, 그런데 그것이 세월 따라 흐르면서 끊임없이 바뀌는 그러한 옷 문화를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실제로 그렇든 말든 그러한 유니폼을 입고 또는 그런 유니폼을 입으려 애쓰며, 아니면 입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도 또한 다른 형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필요의 발전만이 옷 문화의 진전’을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옷이 사람을 규정한 것이 오히려 진정한 옷 문화의 전개였던 것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아득한 때부터 전해지는 ‘옷이 날개’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옷 정의에 의하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내게 날개를 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가 승인한다면 어떻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이 그리 큰 문제일 까닭은 없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옷을 입어도 옷 입음이 내가 내 날개를 다는 일이라면 아름답게, 부귀하게, 세련되게 입어 그 날개로 내가 꿈꾸는 가장 높고 넓고 자유로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면 되니까요. 옷이 시원찮아 날개 꺾인 새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옷 입음이란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기 위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옷을 입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옷 문화가 옷 입음에 대한 어떤 담론을 어떻게 펼치든 간에 아직도 우리가 여전히 옷을 입는 주체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유를 위한 비상(飛翔)이 옷 입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날개가 날개다워야 합니다. 치덕치덕 온갖 치장으로 날개를 무겁게 하면 그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날개가 먼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또한 내 날개로 날아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나 때라면 그 하늘로 그때 굳이 날 필요도 없습니다. 날개를 바꾸든지 그때나 그곳을 피하거나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에 대한 선택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앞에서 지적한 불편함의 까닭을 조금은 서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옷이 사람을 규정하는 일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자유에의 희구를 억제하기 때문일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 입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옷 입는 일에서의 이른바 ‘파격(破格)’이 그 자유를 보장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정석(定石)’의 정장(正裝)이 그 자유의 드러남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옷의 주인이 되는 일이 옷의 예속에서 벗어나 내 하늘을 확보하는 자유의 우선하는 규범이었으면 좋겠다는 무척 고루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관성적으로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옷의 자리에서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내 옷을 챙겨 입습니다.


>>정진홍(鄭鎭弘) 서울대 명예교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중, 대전고,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서울대·한림대·이화여대 교수 역임.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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