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 ‘한강 효과’ 영향… 새로운 방식의 독서에 관심

소셜미디어의 쇼츠와 릴스가 뿜어내는 도파민에 반기를 들고 책을 무기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 신드롬 역시 독서 열풍에 강력한 추진력을 더하고 있다.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시대, 텍스트는 어떻게 힙함의 상징이 되었을까?
반갑지만 낯선 텍스트힙
지난 1월 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 ‘사서지원서비스’ 중 ‘도서관 용어 해설’에 새로운 용어로 ‘텍스트힙(Text Hip)’이 추가됐다. 텍스트힙이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힙하다(Hip, 멋있다)’를 합성한 신조어로, 독서 행위가 멋지고 세련된 활동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텍스트힙 열풍은 사실 아이돌 팬덤에서부터 시작됐다. BTS RM이 읽은 책으로 입소문을 탄 ‘요절’은 18년 만에 재출간돼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아이브 멤버 장원영이 웹 예능 ‘살롱드립2’와 tvN ‘유퀴즈’에 출연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와 ‘초역 부처의 말’을 읽었다고 언급하자, 두 책 모두 20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동안 독서는 극소수만의 특권이자 취미로 취급됐던 것이 사실이다. 어렵고 고리타분한 행위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책은 텍스트 자체를 즐기는 것이 남들과 차별화된 ‘힙함’이라고 여기는 Z세대를 만나 변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더 큰 관심을 얻고 있는 텍스트힙 트렌드에 대해, 일각에서는 “자극적인 디지털 콘텐츠로 피로해진 이들이 아날로그의 상징인 책을 통해 무해함을 느끼고 싶어 발생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왜 텍스트인가

텍스트힙 현상이 일어났다고 해서 독서율이 올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4월 발표한 ‘2023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종합 독서율이 43%로 10명 중 6명은 1년 동안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가 시작된 1994년 86.8%에 비하면 절반 이상 줄어든 셈이다.
하지만 10대부터 30대까지의 독서율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독서 플랫폼 밀리의서재가 발표한 ‘독서 트렌드 리포트 2024’ 중 이용자 분석에 따르면 MZ세대인 20~30대가 주요 이용층을 차지하며, ‘2023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서는 10대 청소년의 종합 독서율이 95.8%로, 연간 36권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열린 국내 최대 북페어 행사 ‘서울국제도서전’에도 15만 명의 관람객이 몰려 사상 최대 방문객을 기록했으며, 그중 70% 이상이 20~30대였다. 텍스트힙 트렌드가 MZ세대의 독서 문화 유입을 견인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글을 써야 하는 환경에 노출되는 경험이 많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결국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다. 블로그를 온라인 일기장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늘고, 텍스트 기반 플랫폼인 메타의 스레드(Threads) 이용자가 꾸준히 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네이버가 발표한 ‘2024 블로그 리포트’에 따르면, 2023년 11월부터 2024년 10월 말까지 네이버에 214만 개의 새로운 블로그가 생성됐다. 2020년 대비 블로그 창작자 수는 30% 증가했다. 특히 ‘주간일기 챌린지’는 10대부터 30대까지가 88%에 달하며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스레드는 2023년 7월 출시된 후 1년여 만에 국내 이용자 수를 400만 명 가까이 확보했으며, 이는 약 169% 증가한 수치다. SNS가 차별화된 자기표현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고, 이러한 현상이 텍스트에 열광하는 트렌드로 이어지면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읽고, 쓰고, 나누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날로그 매체인 책을 즐기는 방법은 다채롭다.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올리거나 독서 중인 모습을 인증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이들은 구매한 책을 ‘언박싱(개봉)’하거나 신작 도서를 요약한 내용의 릴스, 쇼츠, 틱톡 콘텐츠를 제작한다. 독서를 혼자만의 취미에서 공유하는 문화로 발전시킨 것이다. 단적인 예로 유튜브 콘텐츠로 ‘독서 브이로그’가 인기다. 독서 브이로그는 단순히 책을 읽는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책을 골랐으며, 어디에서 읽을지 고민하는 등 책을 읽기 전 준비 과정까지 공유하곤 한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독서용품을 소개하며 ‘책꾸(책 꾸미기)’ 문화도 확산시키고 있다. ‘독서링’, ‘북스토퍼’, ‘북커버’ 등 다양한 독서 관련 장비가 등장한다. 실제로 쇼핑몰 ‘지그재그’의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북커버’의 2024년 검색량이 2023년에 비해 28배나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책갈피, 책꽂이 등의 검색량도 각각 154%, 20% 증가했다.
심지어 인간관계에서도 책이 매개체가 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필사가 큰 인기를 얻으며 필사 도서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2023년 대비 필사 도서 판매량이 692.3% 증가했다. 필사는 단순히 베껴 쓰는 행위가 아니라 공감 가는 문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며 기억에 남기는 것으로, 독서의 또 다른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독서가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소통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서평이나 독후감 등 책과 관련된 콘텐츠를 SNS에 업로드하고 해시태그를 달아 공유하는 ‘북톡(BookTok)’의 등장이 그 예다. ‘읽는 것’보다 ‘읽는 과정’에 집중하는 셈이다. 책장을 정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장 투어(#bookshelftour), 홈 라이브러리(#homelibrary) 콘텐츠도 북톡에서 확장된 키워드다. 또한 시 낭독회, 독서 모임, 북토크 등 책을 매개로 다채로운 경험을 추구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텍스트힙을 위해

오프라인 공간의 활용이 중요하다. 책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 이상으로 책 내용을 경험하게 만들고, 작가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읽는 행위를 넘어 기록하고 공유하고 상기시켜 본인의 취향을 쌓아야만 문화로 이어질 수 있다.
텍스트힙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창비, 문학동네 등 여러 출판사들과 밀리의서재 같은 독서 플랫폼 기업들은 흥미를 이끌 만한 책과 작가에 맞는 콘셉트로 팝업스토어를 열거나 체험 이벤트를 열어 책과 연계된 다양한 경험을 선물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산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살려 서울시교육청 남산도서관은 ‘숲속 북크닉’ 프로그램을, 서울시청은 ‘서울야외도서관’이라는 이색적인 행사를 운영했다. 시청 앞 ‘책읽는 서울광장’, ‘광화문 책마당’, 청계천 ‘책읽는 맑은냇가’ 등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하며 다양한 세대를 독자로 유입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서울도서관은 3월부터 ‘독서는 힙하다’는 주제로 독서 모임 ‘힙독클럽(Hip+讀+Club)’을 운영한다. 이는 책을 중심으로 하는 느슨한 관계의 독서 모임과 독서하기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는 새로운 독서 활동으로 채워진다. 이와 함께 도서관 누리집을 전면 개편해 완독 및 필사 인증을 하거나 좋은 책을 추천하면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고, 일정 마일리지 이상 쌓으면 승급할 수 있는 마일리지 제도도 운영할 방침이다. 이러한 활동은 독서를 놀이처럼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독립서점들도 큐레이션 기능을 강화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다. 이는 소비 주기가 짧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같은 책이라도 다른 시선으로 보여주는 큐레이션을 통해 독립서점이라는 공간에 대한 호기심 반, 책에 대한 관심 반으로 그곳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활동은 책과 독자들 간의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