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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기사입력 2017-02-20 11:16

계절과 상관없이 즐겨 먹는 설렁탕은 깍두기가 그 맛을 좌우한다. 여름엔 흘린 땀으로 약해진 몸보신용으로, 겨울엔 언 몸을 녹여주는데 설렁탕만 한 것이 없지 싶다. 마니아들은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넣어 구수함에 얼큰함을 더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직폭력배를 깍두기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헤어스타일을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다녀서 그렇기도 하고 깍두기 국물이 피를 연상시켜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누군가의 빈곤한 상상력이 죄 없는 깍두기를 여지없이 폄하시키고 말았다. 이렇듯 맛있는 김치의 종류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를 이르는 별칭으로 쓰이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깍두기 애호가인 필자로서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필자가 말하려는 깍두기는 이와 달리, 편을 가를 때 어느 한쪽에 붙여주는 덤과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늘 이런 깍두기가 있었다. 놀이를 하려고 편을 짤 때 짝수가 아니면, 한사람이 남게 된다. 남은 사람의 위치가 난감해지는 경우에 깍두기는 이편도 되었다가 저편도 되는 만능선수였다. 그렇다고 깍두기가 놀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부족한 아이를 내칠 수는 없고 함께 놀기 위해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놀고 싶은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언니가 데리고 온 어린애나 형보다 실력이 못 미치는 동생들, 어딘가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깍두기로 끼워주었다.

필자는 전학을 많이 다녔다. 친구를 사귈만하면 다시 전학 가는 바람에 긴 시간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네 번 전학을 했다. 그때마다 늘 외롭고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학교마다 놀이도 조금씩 달라서 따라 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럴 때, 아이들은 필자에게 깍두기를 시켜주었다. 깍두기에게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누리지만, 패배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는 룰이 있었다. 깍두기의 실수를 인정해주고 너그럽게 대했다. 그래서 걸려도 죽지 않는 불사조처럼 게임 내내 함께 놀 수 있었다. 놀이 규칙은 따르지만 벌칙은 받지 않는, 술래를 피해 숨기는 하지만 잡혀도 술래가 되지 않았다. 아마 요즘 같으면 깍두기 같은 존재는 쉽게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약점을 빌미로 괴롭히기보다 그 약점을 보완해주고 기죽지 않고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생의 놀이문화였다.

깍두기를 허용한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그 작은 행복감이 씨앗이 되어 더불어 사는 가치를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운동회에서 달리기하던 한 초등학생이 넘어졌다. 넘어진 친구를 두고 일등을 하기 위해 앞으로 달리는 대신, 뒤로 달려가 쓰러진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함께 달리던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다시 나란히 달리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 되었다. 얼굴 가득, 좋은 일을 한 뒤의 뿌듯함이 번지고 있었다.

‘지고도 이겼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에서 깍두기였던 지난 시절의 필자를 떠올렸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따뜻한 감성과 사랑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변함없이 간절하다. 어쩌면 깍두기 정신은 그런 본능에서 싹 튼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로 시끄럽던 놀이터는 휑하고 집에서 혼자 논다. 혼 밥, 혼술을 즐기는 문화가 늘어가고 있다. 무엇이 함께보다는 혼자가 즐겁게 하는 걸까? 편안한 것인가?

바로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깍두기이고 싶어 하며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깍두기 문화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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