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대학교 사진반에서 활동할 때의 일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전국의 프로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하는 ‘전국 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필자의 집에서는 필자가 사진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 사진을 찍을만한 카메라도 없었다. ‘미놀타 하이매틱’이라는 2안리플렉스 카메라로 기념사진이나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주제를 제외한 배경은 흐리게 찍히게 하는 아웃 포커스 효과가 있는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필수였다. 후배가 일안리플렉스 니콘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필름을 한 통 사주고 절반씩 찍기로 했다. 오전에는 광선 조건이 안 좋기 때문에 오후 측광이 들어 올 때까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측광이 되는 오후 4시쯤 되자 후배의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연못가로 갔다. 마침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여인들이 있어 피사체로 잡았다. 한복도 아름답고 춤추는 모습은 더 아름다웠다. 사진은 물에 비친 모습이 있으면 더 아름답다. 이것을 모두 한 커트로 잡아 셔터를 눌렀는데 3장에서 멈췄다. 그 당시 필름은 100피트 필름을 암실에서 20장으로 잘라 파는 형식이었는데 간혹 자투리에 걸리면 그런 일이 있었다. 후배는 정확히 먼저 10장만 찍었다.
인화를 해보니 단 3장의 사진이었지만, 왠지 큰일을 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유명 상업사진가로 이름을 떨치던 고문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술만 마시다가 겨우 3장밖에 못 찍었다는 것에 대해 큰 질책을 당했다. 사진 예술을 대하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자신 있게 내 보인 사진도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져 일단 사진을 대회 주최 측에 필자 임의대로 접수시켰다. 고문 선생님도 당연히 여러 작품을 접수시켰다.
심사 발표 며칠 전 다른 촬영대회 입상작을 전시한 사진전시회에 갔었다. 그때 대상작이 필자가 찍은 사진과 거의 유사했다. 장소와 모델, 그리고 화면 구성이 거의 비슷해서 놀랐다.
드디어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필자 작품이 당당히 입상한 것이다. 고문 선생님은 여러 작품을 냈는데 한 편도 입상을 못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입장이 ‘청출어람’이라 하기에는 난처했다.
이 작품은 1979년 미국은행(Bank of America) 재직 중에 다시 한 번 큰일을 냈다. 당시 미국은행 본사에서 월간으로 사내보가 나왔다. 전 세계 미국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진 콘테스트가 있어 이 작품으로 응모했다. 꿈에 내 작품이 표지사진에 실린 것이 보였다. 출근하자마자 지점장이 불러 갔더니 잡지 표지사진에 내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꿈과 현실이 딱 맞은 것이 처음이다. 이 일로 당시 사내 결혼을 목표로 연애 중이던 아내가 처가에 알리고 장인어른이 필자에게 당시 50만원을 주며 카메라를 사도록 했다. 그 돈으로 니콘 FM을 샀다. 꿈에 그리던 일안리플렉스 카메라를 갖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