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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 이야기-설날 음식] 세뱃돈 대신 받았던 눈깔사탕

기사입력 2017-01-06 14:28

아버지는 섣달그믐날 저녁에는 밤새도록 온 집안에 불을 밝혀놓아야 조상님들이 잘 찾아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느새 해가 지면서 집안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며칠 전 동네 방앗간에서 뽑아다 놓아 꾸덕꾸덕해진 가래떡을 써셨다. 설날 아침에 끓일 떡국 떡을 준비하시느라 밤늦도록 떡국떡 써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섣달그믐날에 잠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억지로 버티다 결국 자정 조금 넘은 시간에 모두 곯아떨어졌다.

어김없이 설날 아침은 밝아왔다. 아버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큰 마당은 물론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마을 어귀까지 50여 미터 이상 말끔히 쓰레질을 하고 들어오면서 전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직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들을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깨우셨다. 새벽에 아버지가 말끔히 쓸어놓으신 길 따라 두루마기 옷고름 휘날리면서 사촌 남동생들 앞세워 휘적휘적 대문 안으로 들어서시는 작은아버지의 손에는 정종병이 달랑 들려 있었다.

드디어 대청마루에 정성껏 차례상이 차려지고 조상님의 상청이 열렸다. 설빔으로 모두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서니 그 숫자만 해도 열서너 명쯤 되어 보인다. 필자의 형제는 8남매, 그중 아들이 5형제. 작은아버지의 자손들까지 순서대로 늘어서 있으니 대청마루가 꽉 찼다.

차례 예식이 시작되면 조상 윗대 할아버지에서부터 차례차례 떡국과 빚은 술을 정성껏 올리신 후 아버지는 나직한 헛기침을 하셨다. 그 신호에 맞추어 우르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필자를 포함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어른들 따라 대청마루에 쪼르르 엎드린 채 어른들이 언제 일어나나 좌우로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아이가 있어 킥킥대며 웃기도 했다. 모두가 일어설 때 엎드리고, 엎드릴 때 일어서는 아이 때문에 안 그래도 겨우 참고 있었던 웃음보가 터지면 참으려고 애를 써도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열 번도 넘게 절을 하는 동안 킥킥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버지는 산만해진 아이들 쪽을 쓱 한번 훑어보셨다. 그러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들 움찔 놀라 얼어붙은 표정이 됐다.

침묵이 흐른 다음 아버지는 다시 눈빛을 풀고 차례를 마치셨고, 불호령이 떨어질 줄만 알았던 아이들은 아버지가 “조반을 서두르거라!” 한마디 하면 “휴! 천만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떡국으로 아침상을 물린 후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놓은 음식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면 아이들도 따라 부지런히 선산(先山)으로 향했다.

산소 위에 남은 잔설을 치울 때도 있었지만, 눈이 아주 많이 왔던 어느 해에는 눈 위에 그대로 돗자리를 펴고 절을 했다. 조상님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손과 발이 시려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인 사랑방에 들러 한 분 한 분께 세배를 하며 새해 인사를 올렸다. 이때 어르신들은 덕담과 함께 세뱃값으로 한과(漢菓)나 떡, 식혜 등을 내놓았으며 슬그머니 눈깔사탕을 손에 쥐어주셨다. 달콤했던 그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세뱃값으로 먹을 것을 내놓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마음이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요즘 아이들처럼 세뱃돈 받으려고 미리 계산을 하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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