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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런 마음이었으면

기사입력 2016-06-29 17:50

▲'이제야 나는 삶을 얘기할 수 있겠네'의 표지 사진. (양복희 동년기자)
▲'이제야 나는 삶을 얘기할 수 있겠네'의 표지 사진. (양복희 동년기자)
책 한 권을 펼쳤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할 때 선물받은 책이었다. '이제야 나는 삶을 얘기할 수 있겠네'라는 제목으로 한 젊은이가 중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며 담담하게 써 내려간 내용이었다. 그는 지나온 날에 신명 나게 살아왔지만 병들어 지치고 나약해진 현실의 영혼 앞에 지나온 삶과 남은 삶의 회한, 인생에 대한 후회와 간절함 들을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갑자기 처해진 절박한 삶 앞에서, 더구나 힘겨운 이민생활 속에서는 하나님과 교회를 접해야만 함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때로는 정서적 마음의 의지와 외로운 타지 생활의 위안으로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가족 또한 미국 이민생활 동안 본의 아니게 신앙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낯선 이민 초기, 교회에서 베풀어 주는 사랑의 대가만큼이나 무조건 열심히 봉사 생활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늘 이방인에 머물고, 아무 느낌이 없는 나그네, 그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며 왔다 갔다만 하는 평신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반복들은 오히려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신앙에 라도 의지하기를 원해보지만 그 기대감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교회가 안정될라치면 잡음이 생기기 시작하고 머리수가 많아지면 이권다툼이 생겨나고, 목사님들은 신도들을 편가르고 신도들은 목사님을 심판대에 올려 마구 난도질을 해대고 전쟁터가 돼버린 교회는 결국 불씨의 잿더미가 되어 초라한 폐허가 되어 남은 자들만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찌 모든 세상사가 아니, 한 지붕 교회 아래 제각각 목소리 높은 신도들이 서로의 입에만 맞을 수가 있을까. 한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요란한 잡음으로 세월을 가르는데, 하물며 미국까지 건너온 개성 강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하나가 될 수가 있겠냐 마는 필자 같은 초보 신도의 눈에는 가히 아름답지 않은 믿는 사람들 삶의 이면이었다.

서로 맞추면서 인내하는 것. 인내하면서 배워가는 것. 인생을 말씀으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일반 대중들보다는 적어도 신앙인이라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신앙에 대한 근본 목적이 흔들리는 오늘날은 인간의 유독한 심리가 포화상태를 넘어 그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인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든다.

필자도 때때로 남들처럼 신앙의 길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고, 인간의 모순들만 눈에 보이는 자신이 힘들고 고독함에 방황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평범하게 느낌 없는 소속감으로 구속력 없는 초심자가 때론 자유롭고 평화롭기도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수없이 많았고 맘만 먹으면 그때마다 또 옮기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인간은 왜 하나님 앞에서도 아니, 위대한 신의 존재 앞에서도 그 끊임없는 욕심의 달성을 위해서는 한없이 싸워대야만 하는지, 고개 숙여 매달린 예수님이 가슴 아프고 처절하게만 다가온다. 또 교회를 옮겨야 하는, 떠나야 하는 현실 속 평신도의 마음은 마냥 가난하기만 헸다.

살면서 언제나 우리에겐 각자 주어진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그 종착점은 순서 없이 당장 내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정이 흘러 넘쳐 우리 교회라는 소유의 아집보다는 차라리 가끔씩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또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며 숙연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저마다의 삶을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만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만 뒤늦게 삶을 애절하게 갈구하고 삶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얘기하기보다는 미리미리 쌓아가며 준비하는 마음이, 즉 신앙의 자세가 오히려 믿지 않는 초심자에게는 삶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신명 나게 쫒아 가며 애써서 잡아온 욕심의 삶들이 결국은 별 볼 일없는 명예나 이권이었음을 냉철한 이성으로 반성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숭고한 하나님 앞에 차라리 남은 삶에 미련보다는 지나온 삶에 부끄러움을 무릎 꿇고 통성하며, 진심으로 눈물 흘려 참회하는 소망이 담긴 진솔한 아픔의 삶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늘 그런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면한 죽음 앞에서 숙연한, 늘 그 마음으로 고개 숙여 하나님 곁에서 침묵하며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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