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와 분열이 패배를 부른다
광복 70년을 맞아 우리의 근세사를 회고하면서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방송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KBS는 7월 말 1894~1895년 청일전쟁에 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전쟁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툰 전쟁이다. 아산만에서 시작된 전쟁이 황해해전으로,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후 만주, 요동반도, 그리고 중국본토로 들어가는 산해관(山海關)까지 확대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보장됐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승리를 예견했다. 중국은 아편전쟁 후 50여 년간 서양 열강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에는 이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흔히들 명치유신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보수-반동정권이 지배한 중국에 이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패배를 설명하는 편린일 뿐이다.
당시 중국은 근대 이전 유럽의 상황과 유사했다.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엄청난 개인 비용으로 (사실은 국민 세금이지만) 양성한 ‘국왕 개인의 군대’가 전쟁으로 약화되면 국내정치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보았다. 전쟁이 장기화돼 병력이 소진되면 승리한다 해도 국내의 반대세력들이 이 틈을 이용해 반기를 들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단기전으로 끝났다. 상대방과 한번 부딪쳐 서로의 힘을 시험해 본 뒤 곧 협상으로 들어가 주고받기를 하면서 병력 손실은 최소화하려 했다. 전쟁이 정치·외교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시기 중국은 이보다 더 심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조정의 지휘 아래 있으나 워낙 땅덩이가 커서 통합된 단일 명령체계를 갖춘 ‘국군’이란 개념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 제국 군대의 모태인 8기군 외에 몽골, 회(무슬림), 한족 부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지역 단위로 나누어져 분리·통치됐다. 그러나 8기군은 나태해져 과거의 용맹성을 잃었고 태평천국의 난/운동(1851~1964)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같은 집단들이 진압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관계를 총괄하던 인물은 이홍장(李鴻章)이었다. 그는 태평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의 회군((淮軍-안휘성 일대에서 조직한 의용군) 출신이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후계자로 회군을 배경으로 수도 북경이 아닌 천진(天津)에 거주하면서 중국 북부의 해군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북양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중국의 외교, 군사, 경제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조선왕’이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길을 국내정치로 돌려보면 북경의 만주조정과 이를 둘러싼 보수-반동 집단들의 끊임없는 견제는 물론, 다른 지역 군부의 질시와 경쟁에 싸여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정통 왕조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경성·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관리의 지위는 항상 불안했다.
중국 해군은 겉보기에는 당당했다. 서양식으로 북양, 남양, 복건, 광동함대 등 4개 함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중 북중국(황해) 일대를 담당한 북양함대는 ‘극동’ 최강의 함대, 세계 8위의 함대이며 함선 78척, 총 배수량 8만3900톤으로 일본해군 전체를 능가하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북양함대 기함(旗艦) 정원(定遠)과 동급인 진원(?遠)은 독일에서 건조돼 배수량이 7670톤으로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松島, 4217톤 영국에서 건조)의 두 배에 가까운 덩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일본과 싸우기 싫었다. 20년 넘게 키운 북양함대와 육군이 여전히 문제점이 많았으며 전쟁에서 타격을 입으면 북경에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로 넘칠 것이고 간신히 버텨오던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 다른 함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전쟁에 전력투구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눈은 국내정치에 둔 채 떠오르는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피해를 줄여 군사력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의 승패가 무기와 병력의 수로 결정되던가? 총지휘관은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망설이고, 병사들은 훈련과 정신무장이 안 되어 있고, 부대 간 유기적인 상호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북양함대 예산은 위에서는 서태후가 공공연히 빼돌려 별장 이화원(?和園)에 연못을 만들고 그 흙으로 산을 쌓는데, 전선들은 전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개조를 못하고 정비 불량으로 규정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탄약의 비축도 불충분해 해전 중 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포에 장전한 포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구경이 다르며 오랫동안 내부 부식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의 실화소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홍장은 정원과 진원을 점검하자 사용 가능한 주포 포탄이 세 발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합쳐 단지 여섯 발뿐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정원에 한 발, 진원에 두 발, 모두 합쳐서 세 발입니다.’
정원과 진원에는 주포가 각각 4문씩 있었다. 또 포의 구경 15인치에 쓸 수 없는, 예를 들어 10인치짜리 포탄이 준비됐다면 어떻게 포를 발사할 수 있겠는가. 육전의 승패를 가른 평양전투(1894) 직후 일어난 황해해전에서 중국은 10척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고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다. 다음 해 일본군이 위해위(威海?)를 공격하자 중국 해군은 정원의 배 밑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 진원은 전리품으로 빼앗긴다. 이후 진원은 러일전쟁 때 고물 취급을 받지만 발트함대를 섬멸한 대한해협 전투에서 러시아 수송선을 공격하는 등 ‘적국’을 위해 봉사했다. 중국을 대표하며 위용을 과시하던 전함의 기이한 운명이었다고 하겠다.
이 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이홍장과 일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청일전쟁의 역사를 읽으면 통영함 비리사건이 떠오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삼국통일의 정치학><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