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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삶꾼 무애의 이야기

기사입력 2015-02-17 15:40

내가 만난 영화, 그 두 번째

필자는 고 1때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는 모범적(?) 학생이었다. 그러나 고 2가 되어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당시 필자는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주로 걸어서 통학을 했는데 걸어 다니는 길목에는 속칭 하코방이라고 부르던 구멍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주인은 대개 늙수그레한 남자 노인네들(그렇지만 지금의 필자보다 대부분은 더 젊었을 것이다)로서 손님도 별로 없어서 대개는 동네사람들과 담배나 소주 아니면 푼돈내기 장기들을 두고 있었다. 이런 곳을 지나가게 될 때에는 다리도 좀 쉴 겸 장기구경을 하다가 필자도 모르게 훈수를 해서 야단도 여러 번 맞았지만 어쩌다 상대가 없을 때에는 장기 상대도 해 주면서 이럭저럭 이분들과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들 구멍가게의 열어 놓은 문짝에 대개 주변에 있는 삼류극장들의 영화포스터들을 붙여 놓았고 이들 포스터의 아래 쪽 구석에는 소위 포스터권이라는 것이 붙어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가면 3일간의 상영기간 중 마지막 날에는 공짜로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필자는 영감님들에게 떼를 써서 포스터 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주로 집에 가는 길목에 있던 동도극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때 본 영화 중 <파리의 연인(Funny Face)>은 한 순진한 소녀가 파리의 일류 모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뮤지컬 드라마로서 청순하고 매력적인 오드리 헵번과 당대 최고의 무용수 프레드 아스테어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당시까지 <로마의 휴일>을 보지 못했던 필자는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을 처음 보자마자 그대로 푹 빠져 왕 팬이 되어버렸다.

<랩소디 인 블루> 등으로 유명한 조지 거슈윈의 재즈 선율이 작품의 묘미를 한껏 살려주며, 할리우드 최고의 의상디자이너 에디스 헤드의 화려하고 황홀한 의상 쇼 속에서 오드리 헵번의 매력이 더욱 빛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다섯 번이나 극장을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또 하나 <지상에서 영원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다. 진주만 공습 직전, 하와이의 미군 기지를 무대로 평범하고도 다양한 군인들의 갈등, 사랑, 좌절 등과 함께 부대 내의 폭력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영화는 1953년 제25회 아카데미상을 8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이 영화는 후에 세계적 가수가 된 프랭크 시나트라가 데뷔하자마자 남우조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고, 바닷가에서의 워든(버트 랭커스터)과 캐런(데보라 커)의 키스 신은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매지오(프랭크 시나트라)가 뚱보 저드슨(어니스트 보그나인)의 폭행으로 죽은 후 프루잇(몽고메리 클리프트)이 밸브가 없는 신호용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주제가 <재입대의 블루스(Reenlistment Blues)>는 참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려 그 장면을 다시 보러 극장을 4번이나 갔었으며 나중에 트럼펫을 꼭 배우겠다고 결심까지 했었다.

이렇게 한 번 영화에 재미를 붙이게 되자 때로는 계림극장이나 명동극장 등 시내 중심부까지도 진출하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브리지트 바르도의 전라(全裸) 신이 잠깐 나온다 하여 그 당시로서는 최고로 야하다고 하던 이라는 영화를 보러 명동극장에 갔다가 물리를 가르치시던 K선생님을 만난 일이었다. 그분을 보는 순간 아찔하기는 했지만 돈암동에서 명동까지 가서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갔는데 도저히 그냥 나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리저리 피해가며 볼 기분도 아니어서 될 대로 되라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오히려 그때까지도 필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시던 선생님 앞으로 일부러 걸어가 꾸뻑 절을 하고는 선생님께서도 이런 영화를 보러 다니십니까,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히 K선생님께서도 요 녀석이 하시면서 꿀밤을 주시기는 하셨지만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아 무사히 영화를 보고 나올 수 있었다. 여하튼 이렇게 영화를 보다보니 나중에는 제작자 누구, 감독 누구, 배우 누구 하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내용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고 2가 끝나갈 때쯤 1년 동안 본 영화들을 세어 보았더니 136개였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물론 개중에는 동시상영으로 본 것도 여러 개 있어서 극장을 그 회수만큼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버릇은 고 3이 되면서 일단 수그러들었으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꽤 자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런데 당시에는 유일하게 단성사만 예약제도가 있었고 또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영화라도 미리 영화를 보려고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데이트 도중에 갑작스레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예약을 하지 못 해 표를 사놓고 두,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자주 보러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단성사의 경우는 상영시간 좀 전에 예약창구에 가서 예약을 했으니 표를 달라고 하다가 이름이 없다고 하면 “이상하다, 분명히 예약을 했는데.”라면서, 그러면 예약하고 안 온 다른 사람 표라도 달라고 하면 대개는 표를 살 수 있었다.

이 방법이 실패하거나 다른 극장의 경우는 극장 기도(입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일본어)를 찾아가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형! 표 없수?”라고 묻는다. 당시 기도들은 대개 동네 깡패의 중간보스쯤 되는 사람들로서 월급 대신인지 부수입인지는 모르지만 매회 표를 몇 장씩 가지고 있었고 필자의 말은 똘마니 중 한 명인 척하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으니 표 좀 구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면 때에 따라 두 장 내지 넉 장을 구할 수 있었고 표 값을 지불할 때는 우수리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넉 장일 때는 주변에서 표를 구하려고 서성대는 사람들에게 나머지 두 장을 넘기면 된다.

이런 방법이 통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 본의 아니게 잠시나마 노랑머리파라는 동네 깡패들과 어울렸던 경험이 있었던 데다 어차피 그들에게도 필자가 자기들의 똘마니든 아니든 표만 팔아주면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혼 후에는 공부하랴, 아이들 기르랴 등 이런 저런 사유로 영화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당시까지는 영화비디오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으며 그저 음반 모으기에만 열을 올렸다.


▲임성빈 월드뮤직센터 이사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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