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희망상]

꽃잎이 지는 시간
2018년 겨울, 어머니는 인후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다. 의사 선생님은 차분하게 CT 영상을 가리키며 설명했지만, 내 귓전으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손을 꼭 쥔 채 진료실 의자에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휴직계를 제출했다. 칠판 앞에 서서 미래를 이야기하던 교사로서의 소명보다, 무너져가는 어머니의 세계를 붙잡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변에서는 전문 간병인을 쓰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전담 간병인의 길을 택했다.
첫 항암 치료가 시작된 날, 병실 창밖으로 겨울 해가 짧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투명한 링거 줄을 타고 흐르는 항암제를 바라보며, 나는 어머니가 평생 좋아하셨던 선운사 동백꽃을 떠올렸다.
“엄마, 봄이 오면 선운사에 꽃 보러 가요.”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지만 치료가 본격화되자 어머니의 육체는 급격히 마모됐다. 구역질은 심해졌고, 식욕은 사라졌으며,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떨어졌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거울을 보시더니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의 남은 머리카락을 깨끗이 밀어드렸다. 전기이발기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고,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내 가슴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산다는 것은 서서히 태어나는 것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이 문장을 나는 대학 시절 처음 읽었다. 당시에는 그저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밀어드리는 순간, 나는 그 문장의 진짜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삶은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러나 곧 섬망이 찾아왔다. 2019년 겨울, 밖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계절을 물으면 어머니는 “꽃 피는 봄”이라 답하셨다.
“엄마, 지금 겨울이에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야, 봄이야. 선운사에 동백꽃이 활짝 피었을 텐데….”
장성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오빠’라고 부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내 손을 잡고 “오빠, 엄마는 어디 갔어?”라고 물으셨다.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해지자 비위관을 삽입했다. 하루 여섯 번, 나는 커다란 주사기에 미음을 담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삶에 대한 의지가 서서히 휘발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머니의 마른 손을 잡고 속삭였다.
“엄마, 조금만 참아요. 봄이 오면 선운사에 꽃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운명은 잔인했다. 2019년 12월 말 갑작스러운 패혈증이 덮쳤고,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나는 학교에서 근속 10주년 기념으로 받은 황금열쇠를 녹여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어머니의 야윈 몸에 걸어드렸다. “엄마, 엄마는 우리 가족의 황금 같은 존재예요.” 의식이 희미해지기 전, 당신이 이토록 사랑받는 존재였음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20년 새해 첫날 새벽 4시,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고, 나는 눈길을 헤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마지막 순간,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어머니는 눈을 살짝 뜨시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휘이익, 푸슈. 휘이익, 푸슈.”
그러나 어머니의 인공호흡기 소리의 환청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삶이란 결국 이 단순한 반복에 달려 있구나.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다시 들어오는 일. 그 반복이 멈추는 순간, 삶도 멈춘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브라보는 어디에 있을까. 어머니를 보내드린 이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또 다른 겨울
어머니를 보내드린 후 복직한 학교는 코로나19에 잠식돼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2020년 가을, 나는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하필이면 암 병동 6층, 어머니가 계셨던 바로 그 층에 내가 입원하게 됐다. 쉰을 갓 넘긴 나이에 나는 처음으로 환자가 됐다.
입원 수속을 밟으며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 복도, 이 냄새, 이 소리들. 모두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었다. 수술 후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나는 어머니와 똑같은 민머리가 되어 항암 주머니를 옆에 차고 차가운 방사선 조사대 위에 올랐다.
“움직이지 마세요. 시작합니다.”
방사선사가 말하고 방을 나갔다. 두꺼운 납문이 닫히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기계가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보이지 않는 방사선이 내 몸을 관통했다.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어머니가 홀로 견뎌야 했던 그 고통이 얼마나 시리고 외로운 것이었는지를.
52세부터 시작된 항암 치료는 시간을 잘게 부수었다. 하루라는 단위는 의미를 잃었고, 대신 ‘이번 주사’, ‘다음 검사’, ‘오늘 컨디션’ 같은 말들이 삶을 대신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울을 오래 보지 않았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은 내가 서서히 ‘환자’라는 단어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았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통증이나 부작용보다 교단에서 내려온 것과 글을 쓰지 못하게 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국어 교사로서 글을 써온 사람이었다. 글은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였다. 그런데 항암이 이어질수록 문장도 암에 걸렸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고, 생각도 중간에서 자주 끊어졌다.
펜을 잡아도 몇 줄을 넘기지 못했다. 혹시 이게 끝일까. 다시는 이전처럼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암보다 더 깊이 나를 찌른 질문이었다. 나의 브라보는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박수 한 번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일까.
어느 날 코로나19 확진자가 병동에서 발생했다. 병동이 폐쇄됐지만, 그 안에서 항암은 그래도 이어졌다. 텅 빈 복도, 마스크를 쓴 의료진, 혼자만의 고립된 투병. 그것은 마치 감옥과도 같았다.

철봉을 붙잡는 손
어느 날 오후, 방사선 치료 대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요즘 청소년들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앵커의 말과 함께 자료 화면으로 철봉에 매달린 한 여학생이 죽을힘을 다해 오래매달리기를 하는 모습이 나왔다. 땀에 젖은 얼굴, 떨리는 팔, 악다문 이. 그 아이는 필사적으로 철봉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번개처럼 깨달음이 왔다. 이 질병 역시 특별히 나에게만 찾아온 저주가 아니라, 누구나 인생이라는 체력장에서 치러야 하는 ‘오래매달리기’ 시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머니도 그 철봉을 붙잡고 계셨고, 나도 지금 그 철봉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철봉을 놓지 않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항암 주머니를 차고 병실 책상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노트에 글을 썼다. 고통이 혈관을 타고 흐를 때마다 나는 시를 썼다. 쓰는 것이 유일한 호흡이었다. 문장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나는 한 번 더 숨을 쉴 수 있었다. 글쓰기는 더 이상 성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다시 삶 쪽으로 당겨주는 최소한의 선택이었다.
겨울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나는 추위 속에서도 붉은 꽃잎을 피우고 싶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셨던 그 꽃처럼, 나도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브라보가 될 수 있을까.
2021년 봄 나는 그간 써놓은 시들을 모아서 문예지에 투고했고, 놀랍게도 등단 소식을 들었다. 항암 약이 혈관을 타고 흘러 구역질이 심해질 즈음인데도, 나는 달디단 호흡을 그제야 쉴 수 있었다.
호흡과 호흡 사이
하지만 기쁨도 잠시, 2022년 여름 갑자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호흡이 더 힘들어졌고,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심해졌다. 새벽 3시, 나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진단 결과는 급성호흡곤란증후군(ARDS)이었다.
“사망률이 40~50%에 이릅니다. 즉시 중환자실로 옮기겠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을 보냈던 바로 그곳. 나는 어머니가 누웠던 것과 똑같은 침대에 누웠고, 똑같은 인공호흡기에 연결됐다. 기관삽관 튜브가 목구멍을 통해 기도로 밀려 들어갈 때 나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휘이익, 푸슈. 휘이익, 푸슈.”
인공호흡기는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내 폐에 산소를 밀어 넣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시감이 스쳤다. 이 장면을, 이 소리를, 나는 이미 한 번 살아본 적이 있다는 느낌.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겹쳐진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말을 잃자 설명도, 요청도, 다짐도 할 수 없었다. 그 침대 위에서 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유지되고 있는 존재였다. 그 상태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얼마나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 실감했다.
그 침대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여기까지일 수도 있겠구나. 그 생각이 떠오른 뒤로, 나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두려움조차 붙잡을 힘이 없었다. 나의 브라보는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일까. 아무도 모르는 이 중환자실에서.
하지만 그 적막한 공간에서 나를 지킨 것은 밤샘 간호를 마다하지 않았던 의료진의 헌신적인 손길이었다. 밤 11시, 12시, 새벽 2시, 4시. 간호사들이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며, “괜찮아요. 이겨낼 수 있어요”라고 속삭여주었다.
어느 날 밤 박 간호사님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어머님도 이 자리에 계셨죠? 제가 기억해요. 어머님은 끝까지 아들 생각하시면서 가셨어요. 선생님도 힘내세요. 어머님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세요.”
그 말에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천천히 피어나는 것들
며칠 지났을 무렵,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숨이 완전히 기계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간호사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의 온기는 설명보다 분명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누군가의 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고통이 남긴 것은 상처가 아니라 깊이였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는 한 번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숨 하나씩, 생각 하나씩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겨울 추위를 견디며 천천히 꽃봉오리를 틔우는 동백꽃처럼.
기관삽관 튜브를 제거하는 날, 나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목은 쉬어 있었고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그것은 삶의 목소리였다. 간호사들은 박수를 쳤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겼을 때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당연한 내일’을 전제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회복은 느렸고, 몸은 쉽게 지쳤다. 하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또렷해져 있었다.
철봉 끝의 봄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전과 같은 교실에 서 있었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시간의 무게를 느끼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날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철봉에 매달리고 있었다. 체력 측정 시간이었다. 오래매달리기.
규칙은 단순했다. 손을 놓는 순간 기록은 끝난다. 아이들의 손이 떨리고, 팔에 힘이 빠져갔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분명히 알았다. 저 아이들 중 누구도 대신 매달려줄 수는 없다는 것을. 삶도 같았다. 항암도, 중환자실의 밤도, 회복의 시간도 결국은 내가 붙잡고 있어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한 아이가 철봉에서 내려왔다. 또 다른 아이는 끝까지 버텼다. 얼굴은 붉어졌고, 손은 감각을 잃은 듯 보였다. 그 아이가 내려왔을 때, 기록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선언했다. 나는 다시 매달리겠다고. 이번에는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 그 순간이 나의 브라보였다. 완치 판정보다 앞선, 더 근본적인 선택의 순간. 다시 일어선 시간이 끝나고, 인생 2막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붉은 꽃잎, 따뜻한 손
그날 오후 나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어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휴대폰을 발견했다. 충전기를 찾아 전원을 켰다. 문자함 ‘임시저장’ 폴더에서 나는 그것을 보고야 말았다.
“아드 ㄹ고마어”
날짜는 2020년 1월 1일. 어머니가 중환자실로 가기 전 마지막 날 밤이었다. 희미한 시력으로,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입력하셨을 그 문자. “아들아 고마워”라고 쓰고 싶으셨지만, 약해진 시력과 떨리는 손가락은 제대로 된 글자를 만들지 못했던 거다.
하지만 그 서툰 글자는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해 매달렸던 사랑의 고백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꼭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4년이 지난 문자가 내 휴대폰으로 전송됐다. 화면에 뜬 어머니의 문자를 보며 나는 답장을 썼다.
“엄마!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저도 고마웠어요.”
이윽고 2025년, 나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날은 결승선이 아니었다. 출발선에 가까웠다. 쉰일곱이라는 나이에, 나는 처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쪽을 선택했다. 인생 2막은 보너스가 아니라 스스로 감당해야 할 선택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운사로 향했다. 동백꽃이 만발한 선운사 길을 걸으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왔어요. 약속 지켰어요. 꽃이 이렇게 예쁘게 피었어요.”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바람에 떨어져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꽃잎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겨울을 이긴 동백꽃. 어머니와 내가 각자의 겨울을 견디며 피워낸 생명의 꽃잎.
어머니와 나, 우리는 같은 고통을 겪었다. 같은 병실, 같은 침대, 같은 중환자실. 시간만 달랐을 뿐 우리의 투병은 놀랍도록 닮았다. 하지만 우리는 각각 꽃잎을 피웠다. 어머니는 “아드 ㄹ고마어”라는 사랑의 꽃잎을 남기셨고, 나는 시와 글이라는 꽃잎을 피워냈다.
등단식에 늦게나마 4년이나 넘어 참석했을 때, 나는 객석 맨 뒷자리에 어머니가 앉아 계신 것 같았다.
“이 등단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저를 지켜봐 주신 어머니와 함께하는 영광입니다.”
이제 나는 글로써 마음과 신체가 고통받는 이들을 간병하는 치유자로 살아가려 한다. 주말이면 병원을 찾아 환자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국어 수업 시간에 나는 칠판에 한 문장을 적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체력장에서 오래매달리기를 하고 있어요.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손을 놓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이 겨울을 조금만 더 버티면 꽃이 피어요. 철봉 끝에서도 봄은 결국 오고, 꽃잎도 피어날 수 있어요.”
나는 그 꽃잎을 가슴에 품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가 남긴 사랑, 의료진이 보여준 헌신, 아이들이 보내준 응원. 그 모든 것이 나를 지탱하는 철봉이 됐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른 이들의 철봉이 되어주고 싶다. 고통받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괜찮아요, 함께 버텨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오래매달리기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것을. 철봉을 놓지 않는 한, 동백꽃은 반드시 계속 핀다는 것을.
내 인생의 마침표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던 거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숨을 고르고, 손에 힘을 주고, 다시 매달리기 위해서였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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