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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

입력 2026-06-13 06: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행복상]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달다. 추석을 맞아 내려온 손주에게 주시려나, 할아버지의 장대 끝에 붉은 홍시가 매달렸다. 홍시는 입보다 눈이 먼저 먹는 걸까. 내 입에 넣을 것도 아닌데 쳐다만 봐도 입안 가득 달콤해진다. 홍시는 감나무 가지 끝을 꺾어서 따야 한다. 감나무는 고집이 세서 결코 홍시만 내어주는 법이 없다. 가지를 살살 달래서 통째로 꺾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맛있는 홍시를 마당에 패대기칠지도 모른다.

가을의 깊고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홍시는 더욱 붉게 타올라 마치 하늘에 여러 개의 해가 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온다. 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배가 부르다. 아마도 씨앗 속에 숨어 있는 숟가락 때문일까. 감 씨앗을 반으로 쪼개보면 신기하게도 그 속에 하얀 숟가락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 단맛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는 홍시가 담긴 소쿠리를 들고 벌써 마당으로 들어가신다. 이제 감나무 끝에는 몇 개의 까치밥만 남아 있다. 손주들이 몽땅 따달라고 졸라도 그것은 까치의 몫이라며 양보하지 않으셨으리라. 지나던 구름이 까치밥에 앉았다. 바람이 시샘하며 구름을 밀어내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기억들이 까치밥에 매달린다.


#1 감꽃

시골에서도 우리 집은 산 고개를 두어 번 넘어야 갈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산속의 평지를 일구어 농번기에만 잠시 살기 위해 지은 농막이었고, 산에서 내려가면 마을에 본가가 있었다. 장날이면 가끔 본가에 들러 필요한 양식이나 고등어를 챙겨 산골로 돌아오곤 했다. 학교에 입학한 언니는 산 아랫마을 할머니 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산골에서는 부모님과 젖먹이 여동생이랑 넷이 살았다. 언니는 방학이 되어야 산골로 왔지만, 고양이 손도 빌리는 농번기가 되면 토요일 학교를 파하고 산골로 들어와 일손을 돕고 일요일 해거름에 마을로 넘어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처음엔 호롱불로 살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에는 남폿불을 썼는데, 대나무숲에서 달려온 황소바람도 남폿불을 이기지는 못할 정도로 힘이 셌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른들은 해가 있을 때 밭일을 마무리하고 밤에는 감나무 가지에 남폿불을 걸어놓고 담뱃잎을 엮거나 고추를 다듬는 지혜를 몸소 터득하셨다. 깊은 밤에는 터 앞까지 멧돼지가 내려와 꽥꽥 울어대도 아버지 굽은 등 뒤에 숨어 있으면 세상 겁날 게 없었다.

담벼락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감나무는 깊고 외로운 산골에서 유일한 내 친구였다. 유명한 사람들은 책이 자신을 키웠다고 하는데, 나를 키운 건 감나무였다. 봄이면 메마른 가지마다 솜털같이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 말을 걸어왔다. 밑둥치에 올려진 큰 돌을 가볍게 들어 올린 것도 여린 새싹 그 녀석이다.

감꽃이 피는 초여름에는 마당이 온통 황금 꽃밭이다. 모심기와 담뱃잎 따느라 바쁜 부모님은 꽃구경보다 별구경 하는 날이 더 잦다. 물론 바쁠 때는 나도 개울 건너 순필네 할배가 끄는 써레 위에 올라타고 한몫 거들었다. 써레질에는 바윗돌이 제격이지만, 봄날의 피로를 달래기엔 여섯 살 여자애의 재잘거림이 더 좋았을 게다.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타박타박 마당에 들어서면 간혹 아버지가 들녘에서 따오신 붉은 멍석딸기가 대청마루 구석에서 칡 잎사귀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노랗던 감꽃이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맞아 빨간 홍시로 마당에 털썩 내려앉을 무렵 감나무 그늘에는 아버지 키보다 더 큰 도리깨가 마당을 후려치고, 논에서는 와롱새롱 탈곡기가 부지런히 돌아갔다. 가을걷이가 되면 마당에서는 남폿불이, 들녘에는 달빛까지 바쁘게 일했다.

하지만 가을걷이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아버지는 장날이면 노름판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 늘어났고, 아버지의 땀방울은 노름판에서 탈탈 털렸다. 어둑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산길을 내려가면, 스산한 골짜기 계곡에 솔가지를 이불 삼아 누워 있는 아버지를 찾곤 했다. 노름판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엄한 화풀이를 엄마에게 하셨고 날아간 밥상이 감나무 둥치에 코를 처박는 날이 쌓여갔다. 결국 아버지는 서른도 되지 않은 꽃다운 엄마와 딸 셋을 남기고 눈설레 휘몰아치는 동짓달 산골짜기 계곡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자신의 질긴 운명처럼 끈적한 담뱃잎을 홀로 말리고 모를 심고 가을에는 손끝이 갈라지도록 목화솜을 땄다. 뽀얀 목화솜을 뜯으며 눈물을 닦으시던 엄마는 결국 이듬해 감꽃이 피기도 전에 집을 나가셨다. 풍문에는 예쁘고 젊은 엄마가 어느 부잣집으로 재가하여 아들을 얻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인을 잃은 마당은 금세 푸서리로 변했고 살강에 모셔뒀던 아버지의 약탕기는 주둥이가 터진 채 감나무 둥치에 처박혔다. 감나무 가지 끝에 서리 맞은 까치밥만 덩그러니 빈집을 지키게 되었다.


#2 꽃받침

할머니 댁으로 내려왔지만, 아들 잡아먹고 도망간 며느리의 딸자식을 예뻐해줄 사람은 없었다. 손자였으면 그래도 8남매의 장손이라고 부모가 없어도 업어 키웠을 것인데, 손녀가 셋인들 뭣하냐며 할머니는 매일 술독에 빠져 우셨다. 뒷방 통가리에서 생고구마를 꺼내 깎아 먹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깡마른 삼촌은 독기 어린 메밀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설상가상 둘째·셋째 삼촌과 할아버지마저 몇 해 사이에 돌아가시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양식도 없어 면사무소에서 밀가루나 정부미를 배급받아 이고 왔다. 하지만 학교를 파하고 돌아와서 쌀독을 열어보면 휑한 항아리 속에는 보리쌀 대신 술병 서너 개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힘들게 배급받은 정부미와 밀가루를 할머니가 구판장에 가서 모두 술로 바꿔 드신 게다. 찔레꽃이 하얗게 필 때쯤이면 내 얼굴에는 영양실조로 마른버짐이 허옇게 피어올랐다. 그나마 농번기에는 학교도 안 가고 이웃집 밭일을 돕고 받은 품삯으로 밥을 얻어먹거나 와롱새롱 탈곡기가 돌아가는 날에는 운 좋게 대궁밥 한 덩어리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보리밥조차 구경하기 힘든 날이 헤아릴 수 없었다.

감꽃은 꽃받침이 꽃보다 크다. 감꽃이 감으로 조금씩 영글어가는 동안 꽃받침은 비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벌레로부터 감을 보호하기 위해 꽃받침이 훨씬 더 크다. 꽃받침을 잃은 나는 소나기에 젖은 강아지처럼 서러운 삶을 견뎌야 했다. 봄에는 그나마 부지런하게 뛰어다니면 먹을 게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손바닥에 침을 발라 야무지게 소나무에 올라가서는 우둠지를 뚝 꺾어 껍질을 벗겨 핥아먹으면 시원하고 맛있다. 아버지 산소 아래 연못 둑에는 삐삐풀이 있었는데 학교를 파하고 오는 길에 한 줌씩 뜯어와 동생이랑 나눠 먹었고, 재수 좋으면 풀숲에서 멍석딸기를 찾는 때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슬쩍 친구 집을 두리번거린다. 혹시나 그 집에 저녁 밥상이라도 놓일라치면 한 그릇 얻어먹는 횡재를 누릴 수도 있다. 부끄러움은 이미 배고픔이 먹어 치웠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가정 형편에 따라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반에서 절반 정도는 도시에 있는 공장으로 취업을 나갔다. 그것도 성적이 좋아야 괜찮은 공장에 갈 수 있었다. 성적이 좋은 애는 대구의 섬유공장으로, 부산의 신발공장으로 가기도 했고, 마산 땅콩공장이나 고무공장으로 가는 애들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산업체가 있었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공부도 하고 돈까지 벌 수 있는 데다 그 지독한 가난에서 도망칠 수도 있다. 열심히 돈을 벌어 저축도 하고 공부도 하고 동생한테 예쁜 치마도 사 입히고 싶었다. 기대감에 부풀어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채 대구 섬유공장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낮에는 섬유공장에서 기름 냄새에 묻혀 일을 하고 밤에는 상업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낮에 학교를 갔는데, 얼마나 졸았는지 선생님 말씀에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섬유공장의 기름 냄새에 어지럽고 매스꺼웠지만 그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소음이었다. 귀마개를 해도 몇 시간이 지나 밖을 나오면 세상천지가 먹통이 된다. 어지럽고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마네킹처럼 한참 서 있으면 바람이 어깨를 치며 깨운다. 기름때 찌든 밥은 삐삐풀처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밤에 일하고 낮에는 학교에 갈 수 있으니 이런 호사가 따로 없었다. 일하는 틈틈이 영어 단어를 외우려고 손바닥에 적어둔 게 작업반장한테 들켜서 얻어맞을 때도 있었고 베틀에 끼어 손가락이 찢어질 때도 있었다. 특히 야간 근무할 때는 작업반장 눈을 피해 화장실에 앉아서 졸거나 눈을 뜨고 걸으면서 졸았는데, 기계에 부딪혀 목욕탕에 가보면 온통 멍투성이였다. 아차 하는 순간에 기계에 끼면 손가락이 잘리거나 머리통이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어린 날의 잠이라는 게 얼마나 달콤했던지 작업반장한테 몇 대 얻어맞아도 잠이란 놈은 도통 달아나질 않았다.

7년 가까이 공장을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도 하고 입학보다 졸업이 더 어렵다는 방송대학교를 4년 만에 졸업했다. 중학교만 다닌 남편은 마누라가 대학 공부하면 건방지다며 이혼하자는 철없는 소리를 해댔다. 고아로 어릴 적부터 영양실조와 배움의 허기를 안고 살아왔던 나와 달리 남편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았기에 찌든 내 삶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궁밥이라도 한 끼 배불리 먹어보는 게 내 소원이었지.”

“에효, 불쌍하구만. 우리 집은 생쥐도 쌀밥 먹고 살았다니까.”

꽃받침이 컸던 남편은 내 삶을 무슨 전쟁 영웅담처럼 신기하게 듣곤 했다. 때로는 거짓말인가 싶어 나를 떠볼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깨를 우쭐대며 개울에서 물놀이하다 거머리에 물린 자국, 땔감 하다가 낫에 베인 흉터 등을 보여주며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영웅처럼 으스댔다. 남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기라도 하면 영양실조로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면 싸릿대 태울 때 나오는 하얀 거품을 얼굴에 바른 얘기, 고운 흙을 긁어 물에 태워 허기를 채우던 얘기, 가재는 기어 나오지 못하게 양은 주전자에 담아야 하고 메뚜기는 볶으면 다리가 맛있다는 얘기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그렇게 달래고 협박하고 사정하면서 대학원 공부까지 허락받았다. 공부는 잘난 체하는 게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도전하는 것이라는 말에 처음엔 반대하던 남편이 나중에는 제일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하지만 석사 공부를 마쳐도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었다. 보습학원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입시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말 능력이 있는데도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대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 무렵 대학교 입학사정관제도라는 게 생겼다. 성적은 조금 부족해도 앞으로 잠재 능력이 있거나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을 수능점수보다 우선해서 선발하는 새로운 입시제도였는데, 그렇게 선발하는 사람을 입학사정관이라고 불렀다. 내게는 꿈같은 직업이었다. 날지 못하는 호박벌이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입학사정관이라는 직업은 그런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하기 시작했다. 입학사정관, 그것은 마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데,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데도 도무지 취업이 되지 않았다. 취업이 되어야만 무슨 능력이라도 보여줄 것인데,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니 달리 방법이 없던 터였다. 야심차게 대학원 석사 공부까지 마쳤지만, 나이도 있고 결혼도 했고 늘 뒤로 밀려났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면접은커녕 서류심사에서 매번 낙방이었다. 검정고시에 방송대학이라는 꼬리표가 늘 앞을 막았다. 어쩌다 면접을 보게 되면 내 이력서를 본 면접관들이 여지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 “열정과 자신감은 아주 뛰어나지만….” 그게 다였다. 원서를 너무 많이 쓰다 보니 어떤 면접관은 “이번엔 꼭 합격하세요”라는 말을 먼저 건네기도 했다. 같은 대학교에 대여섯 번씩 원서를 냈고 경기도를 비롯하여 전주, 광주, 충청도까지 뛰었다. 결국 57번의 도전 끝에 지방국립대 입학사정관이라는 첫 기적을 이루었다.


#3 홍시

왕복 여섯 시간의 출근길, 퇴근 후에는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딸아이 뒷바라지에 송곳 꽂을 틈조차 없이 바쁘게 달렸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죽기 전날까지 일할 사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메마르고 거친 날들의 연속이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렇게 꿈꾸던 직업을 얻었는데, 1년이 지나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쉬는 토요일 잠시 들른 병원에서 의사는 덤덤하게 암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의사의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암은 무슨, 내가 어떻게 암에 걸리냐 말이다. 암이라는 것은 영화나 책에서 나오는 말이다. 새까맣게 얼굴이 타들어 가고 바싹 마르고 그렇게 서서히 속절없이 죽어가는 게 암이잖아. 그것은 내 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 얘기였다. 그래야 했다. 아플 시간도 없이 바쁜 나에게 어떻게 그런 무서운 병을 준단 말이야. 무례한 의사에게 잔뜩 짜증만 내고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서른여덟, 유방암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나는 듯 절망감이 몰려왔다. 남편은 애써 괜찮다 했지만, 굵직한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딸아이는 병원 가서 약 먹으면 괜찮아진다며 병원 갈 때마다 내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되짚어주었다. 그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언젠가 신에게 기도했었다. 나를 더욱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어달라고. 그런데 신은 오히려 내게 고통과 풀어야 할 숙제를 주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고통을 견디고 숙제를 풀어내고 나면 나는 더욱 강해질 게 분명하다.

몇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힘겹게 얻은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주치의는 여덟 차례 항암 치료와 28차례에 걸친 방사선 치료를 설명했다. 수술을 마치고 약한 혈관이 자꾸 터져 케모포트를 혈관 깊숙이 심고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1차 항암이 끝나면 머리를 삭발하라는 의사 말에 고집을 피우다가 베갯잇에 한 움큼씩 머리카락이 빠지자 결국 삭발을 해버렸다. 핏기 없는 얼굴에 삭발까지 했더니 영락없는 암환자가 되었다. 파리한 두상을 본 남편이 암자에 갔으면 큰 스님이 되었을 거라며 장난을 친다. 고통을 잊기 위해 더 큰 고통으로 견뎌내자고 생각하며 항암 치료와 함께 책을 집필했다. 나의 암 투병기를 책으로 쓰다 보면 고통을 책 속에 묶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쓰라린 고통도 글로 표현하니 조금씩 치유가 되었다. 이런 다짐을 책머리에 써넣었다.

‘신이 주신 특별 휴가, 휴가 필수품은 웃음, 사랑, 용기, 그리고 약간의 커피값. 주머니 속에 구겨놓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 지친 삶에 암이 길동무로 나선다.’

1년 남짓 암 투병을 하면서 박사논문을 쓰고, 학술연구재단에 논문도 두 편이나 등재했으며, 학술대회에서 논문 발표도 하고, 그 시간을 아껴서 책도 집필을 완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암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몇 달 후에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논문도 등재하면서 몇 곳에 원서를 냈는데, 그렇게 어렵다는 교육공무원 시험에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유방암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계약직 입학사정관으로 거친 삶을 살고 있거나 아니면 과로로 벌써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두 번째 기적이었다.


#4 곶감

1970년대 여자 이름은 ‘순종하다, 예쁘다, 얌전하다’의 뜻으로 ‘영자, 숙희, 미경’을 많이 지었는데, 아버지는 딸이라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큰 인물이 되라며 내 이름에 벼슬의 뜻을 담아 ‘벼슬경’으로 지으셨다. 내가 벼슬을 얻은 게 아버지의 은덕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해묵은 가발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교육공무원 생활을 한 지 7년이 될 무렵 그동안 모은 적금으로 자그마한 집을 장만했다. 마침 키우던 강아지 문제로 집주인이랑 언성을 높이던 때라 우리의 집을 산다는 게 너무 기뻤다. 딸애도 학교에 잘 다니고 직장에서는 사무관으로 승진도 했다. 민원 부서로 발령받는 바람에 악성 민원으로 스트레스 강도가 높긴 했지만, 그런대로 즐겁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면서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내뱉어야 한다는 듯 잠깐 망설였다. 내 눈을 피하며 숨을 깊게 들이키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하는 말이 암이 재발했다는 것이다. 서른여덟에 암을 진단받고 치료를 마친 지 8년 만에 같은 자리에 다시 암이 생겨났다. 정기적으로 검진받고 운동도 하면서 열심히 관리했는데 재발이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완치되었다고 믿었는데, 8년 만에 재발이라니 기가 막혔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처절했던 항암 치료를 또 해야 한다니 벌써 속이 울렁거린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토하고 손발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다시 또 겪으라니, 그냥 죽는 게 낫겠다는 절망감이 몰려왔다. 이토록 잔인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멀뚱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다. 잔인함에 한숨을 쉬어야 할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을지, 아니면 펑펑 울어야 할지 감정들이 뒤엉킨다.

밤새 뒤척이다 동살 무렵 창가에 서서 지나온 삶을 짚어본다. 이른 새벽부터 공단으로 출근하는 차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길 건너편 마트는 벌써 가판에 물건을 내놓았다. 날밤을 지새운 가로등이 섬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거리를 밝히고 있다. 일을 그만두면 앞으로 생활비는 어떻게 하고 병원비에 약값, 애 학원비는 어쩌지? 온갖 걱정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급기야 바닥은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천장은 조금씩 밑으로 내려오고 벽은 서서히 좁혀져서 마침내 성냥갑처럼 작아진 세상이 옥죄어온다.

톺아보니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두메산골에서 메뚜기 구워 먹고 가재 잡던 유년 시절부터, 삐삐풀로 허기를 달래고 운동장 수돗가에서 찬물로 배를 채우던 학창 시절,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직물공장에서 졸다가 매 맞던 공순이 시절을 거쳐 힘겹게 입학사정관이라는 명함을 쟁취했다. 그렇게 얻은 기적 같은 직장을 암 투병으로 뺏기고 다시 나락으로 처박혔지만, 오히려 그 절망을 발판 삼아 박사 공부를 마쳤고 결국 두 번째 기적인 교육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모든 날이 꿈같다. 어제 일처럼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몇 년 아니면 전생이었을까 아득히 멀어진다.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손님, 그렇다고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나에겐 어린 딸이 있고 원수 같은 남편도 있다. “엄마, 저녁에 치킨 먹자.” 슬픔에 허우적거리는데, 딸애는 오히려 아무 일도 아닌 듯 일상으로 나를 끌어낸다. 중요한 것은 그래,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다.

유년 시절 아버지는 마당 한 구석에 큰 돌을 세 개 놓아두곤 딸들이 말썽을 피우면 회초리 대신 돌을 굴려 당산나무를 돌고 오라고 하셨다. 산길은 몹시 후미져서 바윗돌은 잘 굴러가다가도 금세 도랑으로 빠지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앞서가던 언니를 불러야 했다. 아버지는 바윗돌로 훈계도 하시고 자식들의 건강을 덤으로 얻으셨다. 추운 겨울날에는 섬틀 앞에서 거적을 짜시던 우직한 아버지, 어둑새벽부터 바소거리에 거름을 얹어 밭에 나가시던 성실한 아버지에게서 나는 뿌린 만큼 거둬들이는 농사꾼의 지혜와 책임감을 배웠다. 이는 삶이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지팡이가 되었다.

그렇게 일어선 나는 다시 수술과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항암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에 더욱 무서웠다. 다시 머리를 삭발하고 의연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8년 전에 썼던 가발을 왜 여태까지 간직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창고에서 가발을 찾아 다시 씻고 말려서 뒤집어썼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지팡이까지 짚고 어렵게 출근을 이어갔지만, 연이은 치료로 심장에 물이 차서 부풀어 호흡이 가빠지고 성대마비로 목소리도 잃게 되자 결국 사표를 쓰고 치료에 집중해야만 했다.


#5 까치밥

잔인하기 그지없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그래도 신은 내게 시간을 더 남겨주었다. 어렵게 다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원서를 쓰고 서류를 준비하면서 채용 일정들을 일일이 수첩에 메모했다. 하나하나 체크하며 자료를 찾아 준비하고 직무계획서를 쓰고 노력했지만 늙고 병든 내게 기회를 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서른 번쯤 낙방한 후에는 더 이상 헤아리는 걸 포기했다. 저축해둔 돈도 이제 바닥이 나고 대출금 이자는 계속 늘어가면서 마음은 불안하고 절박해졌다.

대신 편의점 서너 곳에서 열 시간 넘게 알바를 시작했다. 편의점 알바는 주로 대학생들이 하는데 다행히 딸애가 알바하던 편의점에 자리가 나서 운 좋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틈에도 꾸준히 취업을 준비했다. 연구원, 출자출연재단, 공공기관, 대학교 등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냈고 충남, 전북, 경북, 제주도까지 원서를 썼다. 계속 헤아렸으면 아마 오십 차례는 되고도 남을 즈음에야 드디어 공무원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도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세 번째 기적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식탁 위에 홍시가 올려져 있다. 붉게 익은 홍시 속에 얼마나 많은 바람과 햇살, 비구름이 들어 있을까. 감꽃 주워 먹던 아기, 삐삐풀 뜯어 먹던 소녀, 매 맞던 어린 노동자, 연구하던 학생, 가발 쓴 암환자, 새내기 공무원, 다시 목소리 잃은 암환자, 편의점 알바생, 살짝 늙은 공무원 모두 나였다. 수많은 바람과 구름, 햇살, 태풍을 견뎌내고 오늘까지 달려왔다. 깊은 산골의 모진 바람과 눈서리 맞은 감이 더 찰지고 깊은 맛을 내듯이 내 인생은 때로는 시큼하고 때로는 떫었다. 하지만 가장 힘들고 절망적일 때, 오히려 나의 삶은 가장 빛났으며 더 달콤해졌다.

홍시를 햇빛에 비춰보니 말간 아버지 얼굴이 비친다. 행여 딸이 굶을까 감씨에 하얀 숟가락을 숨겨두시곤 아버지가 웃으신다. 농사는 사람이 홀로 짓는 게 아니다. 기름진 땅도 필요하고 햇살과 비와 바람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농사꾼은 씨앗을 세 개씩 심어 하나는 사람이 먹고 하나는 땅에 주고 나머지 하나는 하늘에 양보했다. 두 번의 암을 이겨내고 세 번의 기적을 얻었다.

어쩌면 나의 기적은 아버지가 감나무 끝에 남겨주신 까치밥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까치밥이 되고 싶다. 좀 더 다정하고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서리 맞아서 더 찰지고 달콤한 까치밥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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