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준비 없는 퇴직이었다. 늘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남들에겐 입버릇처럼 말해놓고 정작 나를 위한 노후 준비는 없었다. 내 일은 평생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끝내야 끝날 일이라고 자만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나는 35년 동안 영업 조직에서 일했다. 조직 확장과 조직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고 믿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러다 어느 날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은 온통 바뀌어 있었고,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기존의 영업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회복할 수 없는 실적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 능력이 쓸모없다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그 자리를 빨리 내려놓는 것이 상책이었다. 난 서둘러 일터를 떠났다. 은퇴 후 대책, 그런 건 생각할 새도 없었다.
은퇴 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체질적으로 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재취업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사실 내세울 스펙도 없었다.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에 ‘무엇이든 배우자’는 생각으로 원주시 평생학습관에서 한국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웅진에서 아동 출판물을 20년 가까이 취급하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사 수업을 들으면서 ‘재미있게 한국사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한국사 자격증도 따고, 주변 사람들과 동아리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평생학습관에서 ‘문해교사’를 뽑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신청했다. 문해는 한글을 말하고 읽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언어를 이해하고 생활의 지식을 알려주는 생활 문해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을 가르치는 일이 참 근사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열심히 공부했고, 난 문해교사 자격을 갖게 되었다. 문해교사를 하면서 우리나라에 문해 교육생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일본어를 배운 국민학생들, 광복과 6.25로 공부할 때를 잃은 분들, 가난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연들로 공부할 때를 놓친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친정엄마도 학교라는 곳을 가보지 못한 분이다. 장녀인 나는 어릴 적 엄마 대신 고향에 문안 편지를 쓰곤 했다. 엄마가 불러주시는 말을 편지로 옮겨 적으며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철이 없어 알지 못했다. 문맹으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답답한 일인지를….
교사가 되어 수업하면서 어르신들을 통해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까닭에 나는 늦어도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선생님이 되었다. 여러 번, 아니 아실 때까지 가르쳐드리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 열정과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아는 선생님이 되었다.
문해교육 첫 수업은 자기소개서를 꾸미는 시간으로 시작한다. 색연필로 색을 칠하게 하고 모르는 글씨를 알려드린다. 좋아하는 음식, 노래, 가수, 고향, 주소, 생년월일 등을 기록하게 한다. 처음에는 색연필을 잡는 것도, 사람을 그리는 것도 어렵다며 포기하려 하신다. 하지만 1학기가 끝나갈 즈음엔 그림도 색칠도 수준급이 되신다. 어르신들은 늦게 하는 공부가 그리 재미나신단다. 숙제가 없으면 서운해하신다. 그래서 꼬박꼬박 숙제를 내드린다. 숙제는 얼마나 열심히 해오시는지 모른다. 그런 걸 알기에 숙제 검사는 열 일을 제치고 꼭 해야 한다. 숙제 검사 후에 꼭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드려야 한다. 그 도장을 받고 환해지는 얼굴은,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느끼게 한다. 또 수업 시작하기 전에는 꼭 받아쓰기를 해야 한다. 하나도 틀리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쓰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백설이 내린 머리카락에 주름 가득한 학생들의 학구열이 올여름 수은주를 얼마나 올려놓을지 이 교사는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3년째 찾아가는 나의 성인 문해교실은 올해도 경로당이다. 경로당 수업이 끝나면 어르신들은 꼭 마실 것이나 간식을 준비해주신다. 어르신들의 다정함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해마다 문해 학습자 축제가 있는데, 그 축제를 위해 어르신들은 시화전을 준비하신다.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분들께 마음의 글을 표현해보도록 지도하는 것이 내겐 참 어렵다. 하지만 내 어설픈 설명에도 찰떡같이 이해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어르신들이 쓴 시를 읽다 보면, 시적 감수성이 뛰어난 분들이 많다. 한 분은 멋진 시로 강원도 특별상을 수상하시기도 했다. 꽃다발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는데 자꾸 우리 엄마가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작년에는 친정엄마가 김장을 하지 못하셨다.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해마다 김장을 해주셨는데 그것마저 하기 힘드셨다. 엄마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친정엄마표 김장김치가 빠진 밥상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경로당 어르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김치를 챙겨주셨다. 갑자기 내 식탁은 김치 풍년이었다. 그것들은 엄마가 담근 김치 맛은 아니었지만 내 영혼의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어르신들에게서 엄마 품처럼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얼마 전에는 사회복지 교수님 도움으로 어르신들께 인지 치매 검사와 청각 검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르신 중에 유난히 소리를 못 듣는 분이 계셔서 검사를 의뢰했다. 검사 결과 왼쪽 귀는 청각 기능이 아예 없고, 오른쪽 귀는 청각 기능은 남아 있지만 항시 심한 잡음 속에 살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귀에서 나는 물 끓는 소리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다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했다. 자식들 걱정할까 봐 내색도 못 하고 그 괴로움을 혼자 견디고 계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물이 고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러 오신 걸 생각하니 결국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몇 번의 정밀검사를 거쳐 그 어르신에게 딱 맞는 보청기를 해드리게 되었다. 그 어르신은 모든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잘 들리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기뻐하셨다. 자식과 며느리까지 찾아와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좋은 기회가 생겨 도움을 드린 것뿐인데 이렇게 행복해하시니 내가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실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문해교사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내게 주었다. 난 원래 사람을 좋아한다. 매정하고 이기적인 사람 말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 데다 나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걸 좋아한다. 보다 쉽고 재미있게 말할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감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엄마가 물려주신 유산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노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일 것이다.
문해교사는 정말 교학상장(敎學相長)의 표본이다. 나는 어르신들에게 글자와 역사를 알려드리고, 어르신들에게서는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진짜 인생을 배운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처럼 내가 만나는 어르신들은 매 순간 내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하는 참 좋은 스승들이다.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내가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넉넉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학구열이 식지 않도록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재미있고 유익한 수업을 준비해야겠다. ‘가장 편한 쌤, 가장 펀(Fun)한 쌤’, 이것이 문해교사인 나의 목표다. 내가 만나는 어르신들이 배움이 즐겁고,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르신들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선생님으로 남고 싶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내 곁에 남아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