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국의 ‘중장년 진짜 공부’] ‘살아가는 법’
나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웠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들에게 가르쳐줄 게 없다. 아들은 모든 걸 인터넷과 유튜브로 배운다. 그것들이 나보다 더 박식하다. 서글프게도 아들은 그런 사실을 안다. 내게 묻지 않는다. 도리어 아들에게 배워야 할 게 많다. 듣도 보도 못한 제품은 하루가 멀게 쏟아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용어나 개념도 도통 몰라 아들에게 물어야 한다. 따라가기 버겁다.

우리 세대는 오랫동안 가르치는 자리에 익숙했다. 경험을 쌓고, 실패를 견디며, 성취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됐다. 조직・가정・사회에서도 늘 조언하는 쪽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배우는 일에 소홀해졌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여기고,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시대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우리가 멈춰 있는 사이에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그 변화 한가운데 젊은 세대가 있다. 어른의 공부는 이제 그들에게서 다시 시작돼야 한다.
젊은 세대는 분명 우리와 다르다. 이는 단순히 나이 탓은 아니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 익숙한 도구, 관계 맺는 방식, 세상을 해석하는 기준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술을 배운 세대가 아니라 기술과 함께 자란 세대다. 우리는 정보를 찾기 위해 시간을 들였지만, 그들은 손안에서 즉각적으로 정보를 확인한다. 이런 환경의 차이는 사고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우리는 하나의 길을 깊이 파는 데 익숙하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전문성을 쌓고, 그것을 기반으로 삶을 설계해온 반면, 젊은 세대는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탐색한다. 하나의 정답보다는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방향을 바꾼다. 직업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우리는 직장을 중심으로 삶을 꾸렸지만, 그들은 삶을 중심에 두고 일을 선택한다. 안정된 조직보다 자신의 성장과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차이는 때로 갈등을 낳는다. 우리는 끈기와 희생을 강조하고, 그들은 효율과 균형을 말한다. 우리는 위계 속에서 질서를 배웠고, 그들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소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요즘 애들’이라 부르고, 그들은 우리를 ‘꼰대’라 부른다. 이 간극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배움이 시작된다.
“나 때는 말이야”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의 눈빛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경험이 무기라 믿었고, 연륜이 자격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우리는 젊은 세대와 부딪힌다.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는 낯설어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그들은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
MZ세대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지만, 정작 그 안에도 매우 다양한 결이 있다. 1980~90년대생 밀레니얼 세대와 2000년대생 Z세대가 같은 이름으로 묶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50대 이상 기성세대 눈에 그들이 공유하는 몇 가지 특징은 분명히 포착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처음부터 다른 토양에서 자랐다. 기성세대가 ‘결핍의 시대’를 지나며 성장과 효율을 먹고 자랐다면, 그들은 ‘풍요의 시대’ 속에서 생존과 공정을 고민하며 성장했다. 손끝으로 세상을 여닫는 방식이 몸에 밴 세대다. 정보의 비대칭이 사라진 시대에 그들은 권위보다 검증을 신뢰한다.
그들은 ‘나’를 잃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다. 야근은 당연했고, 주말 출근도 충성심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일과 삶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을 이기심이 아닌 자기 존중으로 이해한다. 퇴근 후 상사의 메신저에 즉각 답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기주의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선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참아온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음을 그들은 알고, 그것을 말할 용기도 있다.
그들은 ‘왜’를 먼저 묻는다. 우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지만, 젊은 세대는 납득이 안 되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반항이 아니라 효율적인 업무 파악의 출발점이다. 따지고 보면 ‘왜’를 묻는 사람이 ‘어떻게’도 더 잘 안다.
그들은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하다. 우리 세대는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원래 그런 것”이라며 참는 법을 먼저 배웠지만, 젊은 세대는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는 것을 미덕이 아닌 공모로 여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구렁이 담 넘어가기는 그들에게 가장 큰 불신을 산다. 그 목소리가 쌓여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만들어지고, 갑질 문화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불공정에 민감한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힘이다.
그들은 소유보다 경험을 택한다. 우리 세대에게 집 한 채, 차 한 대는 인생의 목표이자 성공의 증표였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가 여행에 돈을 쓰고,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경제구조는 우리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현실적인 꿈이 아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포기가 아니라 가능한 삶 안에서 찾아낸 행복이다. 그들의 삶을 나태함으로 단정하기 전에, 그들이 처한 조건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돌이켜보면 그들에게는 우리가 어느 순간 잃어버린 솔직함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체면을 지키자’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는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찐 관계’란 결국 꾸밈없는 인간관계를 뜻한다.
우리는 ‘참는 게 어른’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속이 곪아도 겉으로는 웃고, 퇴직할 때까지 속마음을 꺼내놓지 못한 채 살아온 이도 많다. 소통 없는 가정, 감정을 모르는 가장, 번아웃이 돼도 못 쉬는 직장인, 이것이 우리가 배려라는 이름으로 진심을 감춰온 결과다.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은 성숙한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수평적 관계 맺기도 그들에게 배울 점이다. 젊은 세대는 나이와 직급보다 역할과 능력으로 사람을 본다. 이것이 버릇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들은 진짜 실력으로 인정받는 관계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이로 눌러왔던 것들이 ‘실력의 공백을 채우는 수단이었던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권위는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서 온다.
다양성을 대하는 감수성도 그들에게 배울 만한 것이다. 우리 세대가 정상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봤다면, 젊은 세대는 다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내 기준과 다른 삶의 방식을 틀렸다고 보기보단 그저 다를 뿐이라고 여긴다.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배움이 시작된다.
디지털 감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정보를 찾고, 가공하고, 공유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팔로어 수만 명을 가진 젊은 청년이 어떤 기업의 홍보팀보다 빠르게 사회 이슈를 공론화하기도 한다. 이 능력은 새로운 시대의 언어이자,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 언어를 모르면 점점 대화에서 소외된다.
왜 배워야 하는가
“그래도 내가 더 많이 살았는데”라는 말은 솔직한 심정이다. 경험도, 지식도, 연륜도 우리 쪽이 많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는 것이 지금의 세상을 잘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위기는 언제나 과거의 성공에서 비롯된다. 익숙한 방식은 편하지만, 변화에는 둔감해진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새로운 신경 회로를 만들어낸다. 나이 들면서 속도가 느려지기는 해도 그 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배우는 뇌는 늙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 배운다는 것은 뇌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가장 생생한 방법이기도 하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10년 뒤, 20년 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사람은 지금의 젊은 세대다. 그들이 만드는 문화, 그들이 결정하는 정책, 그들이 선택하는 방향이 우리의 노후를 결정한다. 자녀와의 대화가 끊기고, 후배 직원과의 소통이 막히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고립된다면,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니라 삶의 질이 무너지는 일이다.
배움은 앞서가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단절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선택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완성되는 과정이 아니라, 다시 배우는 과정이다. 젊은 세대는 그 배움의 거울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우리는 종종 세대 간의 갈등을 전쟁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이 대립 구도 자체가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다. 어느 세대도 완전히 옳지 않고, 어느 세대도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시대에나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어른이 돼 세상을 이끌었다. 우리가 기성세대에게 새로운 것을 들이밀며 충돌했듯, 지금의 젊은 세대는 우리와 부딪히며 새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배우는 것은 우리 자신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반세기를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지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입히는 것이다. 내가 일궈온 토양 위에 그들의 신선한 감각을 접목해 더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단순히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즘 애들은 말이야”라는 탄식을 “요즘 애들에게 배워야겠어!”라는 탄성으로 바꿀 때, 우리의 노년은 비로소 빛나는 지혜의 시간이 된다. 배움 앞에 나이는 없다.
오늘도 아들에게 묻는다. “이것 어떻게 해야 해?”, “왜 이런 거야?”
어떻게 배울 것인가➊ 판단을 내려놓자.젊은이들의 모습에 우리는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없어”, “개인주의가 강해”라며 빠르게 결론을 낸다. 그러나 판단이 앞서면 관찰이 멈춘다. 이해가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해 없이는 대화가 시작되지 않는다.
➋ 말을 줄이고 들을 준비하자.
우리 세대는 경험을 나누고 조언을 건네며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 배웠지만,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경청이다.
➌ 직접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자녀가 보는 유튜브 채널을 한 번 같이 보고, 즐겨 가는 카페나 공간을 직접 찾아가 보자. “이게 무슨 뜻이야?” 한마디가 의외로 관계의 문을 열기도 한다. 손주 세대와 대화할 때도 “왜 그런 걸 좋아하니?”보다 “그건 어떤 재미가 있니?”라고 묻는 쪽이 훨씬 부드럽다.
➍ “나 때는 이랬어” 대신 “너는 어떻게 생각해?”를 연습하자.
질문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그 질문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세계가 있다.
➎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 중 일부는 시대가 바뀌면서 틀린 것이 됐다. 나이를 앞세운 권위, 무조건적인 희생 강요, 감정 표현의 억압…. 이것들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인정에서 어른의 품격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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