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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ㆍ강인숙 부부의 순간, “끝 아닌 시작”

기사입력 2024-05-21 08:33

[명사와 함께하는 북인북]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던 이어령(1933~2022년) 전 문화부 장관이 영면한 지 2년이 넘었다. 어느덧 구순을 넘긴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남편과의 만남을 다시 떠올린다. 그이만이 아니라 서로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격동기 예술가 부부의 뒤얽힌 삶의 흔적을 차곡차곡 더듬어 신간 ‘만남’에 담았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까까머리를 기르고 있는 대학 신입생의 모습으로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이름을 안 것은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던 것 같다. 머리가 짧아 얼굴이 네모로 보였다. 무언가가 안에 꽉꽉 차서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모습…. 호기심에 빛나는 눈이 눈부셨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펴낸 신간 ‘만남’ 중 한 부분이다. 그는 가장 아끼는 챕터로 해당 구절이 적힌 ‘이어령과의 만남’을 꼽았다. 핵심이고 본질이라고 했다.

“부모는 하늘이 주니 숙명적인 관계지만 결혼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동성(同姓) 집단에서 벗어나 타성(他姓)의 인간과 새로이 결합하는 셈이니 그를 고른 과정과 이유가 중요하죠. 한 사람뿐 아니라 상대 가족과의 만남이기도 해서 더 귀중해요. 그래서 ‘만남’이라는 제목을 붙인 겁니다. 결혼 전보다는 후의 기간이 두 배나 더 기니, 그만큼 무겁게 느껴집니다.”

▲강인숙 관장의 저서와 사인(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강인숙 관장의 저서와 사인(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2주기 그 후

강 관장은 오랫동안 자전적 에세이를 써왔다. ‘아버지와의 만남’, ‘셋째 딸 이야기’, ‘서울, 해방공간의 풍물지’, ‘어느 인문학자의 6.25’ 등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자신과 이 세계가 만나는 순간을 탐구했다. 지난해 출간한 ‘글로 지은 집’은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한 여덟 개 집 이야기와 일상을 풀어냈으며, 이번 ‘만남’은 왜 이어령을 선택했는지,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곱씹으며 70년의 세월을 되짚었다.

“이 선생에 관한 이야기는 되도록 늦게 쓰고 싶었는데, 눈이 나빠져가서 콤퓨타(컴퓨터)를 오래 보고 있기 어려워졌어요. 금년 들어 자주 염증이 생기니 불안해서 내기로 한 거예요. 내게는 그에 대한 증언을 남겨야 할 것 같은 채무감이 있어요. 이제는 나만큼 알고 있는 이가 없기 때문에 교정도 직접 봐야 합니다. 요즘은 자료들을 종합해 이 선생의 연보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 애매한 곳이 더러 있거든요. 대학원 끝나고 바로 강의를 했다고 기억하는데 ‘바로’가 1960년인지 1961년인지 헷갈리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확인하는 작업을 해요. 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부부의 끝없는 창조

이어령, 강인숙 부부는 닮은 듯 다른 한 쌍이었다. 국어국문학과 동창생이라 예술을 최고의 가치로 바라보는 점이 같았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함께 푹 빠지곤 했다. 결벽증이 있고 시간을 구두쇠처럼 쓰며, 혼자 있기 좋아하는 성미도 비슷했다. 그러나 남편의 ‘새것 밝히기’와 부인의 ‘옛것에 집착하기’는 상반되고, 추상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사고로 종종 부딪쳤다.

“가정에서는 아이의 배탈, 지붕 누수, 집안 경조사 같은 일상적인 일이 대화의 주를 이룰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은 집이 낡아서 온돌 파이프를 전면적으로 갈아야 하는데, 그이가 작업 중이라며 서재는 손을 못 대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새집을 지을 때까지 불을 안 때고 지낸 적도 있어요. 하지만 특유의 추상적이고 지적인 화두들은 귀가 번쩍 뜨이고 경이로웠습니다. 내 세계가 침체되는 걸 막을 수 있었지요. 아이를 기르면서 일을 병행하려니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어 지적 영토가 자꾸 줄어드는 게 두려웠거든요. 한편으로는 귀동냥한 지식으로 떠들고 싶지 않아 그에게 영감 얻기를 피했어요. 작아도 좋으니 내 목소리를 지키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해 미안한 때가 많아요.”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따로 그리고 함께인 동행

부부는 유착되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라는 철학자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강 관장은 부부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서 대등한 조화를 이루는 관계’였기를 바란다. 이 선생을 떠올려보면 자기 일을 외곬으로 하던 서툰 가장이었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믿을 수 있는 성실한 남자였다. 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던 사람이었다. 내면에 부인의 건강에 대한 공포가 늘 자리 잡고 있었던 사랑 많은 남편이었다. 강 관장은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무렵의 행동들을 하나씩 공감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상대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약점을 건드리지 않아요. 서로를 참 어렵게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싸우고 나면 꼭 잘못한 쪽이 사과했어요. 만약 한쪽이 아무 말 없으면 다른 쪽이 ‘아, 내가 잘못했나 보다’ 해요. 근본적인 신뢰가 있어 가능했을 거예요. 지금에 와서는 ‘이제 당신을 더 이해하게 됐다’ 전하고 싶습니다. 나도 그의 뒤를 충실히 밟고 있어요. 시인 보들레르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 싫증을 느끼지 않고 관조할 힘과 용기를 달라고 신에게 간청하는데, 그 말에 찬성표를 던집니다. 눈 감을 때까지 자신을 응시하다 가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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