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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 사유와 행동 그리고 ‘약속하는 나’

기사입력 2021-09-09 19:00

[습관의 물리학] Part 3.

습관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노라니 가파른 언덕이 떠오른다. 꼭대기를 쳐다보면 한두 번 한숨이 쉬어지고 마음을 다잡아야 비로소 첫걸음이 내디뎌지는 기나긴 비탈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구나 알다시피 습관에는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이 있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똑같이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좋은 습관이란 예를 들어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거나 혹은 매일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 행동이 몸에 배려면, 비탈길을 한 걸음씩 쉬지 않고 올라갈 때처럼 몸을 뒤로 잡아당기는 무거운 저항과 오래 싸워야 한다. 익숙해져서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도, 이번에는 자잘한 지루함이나 피로를 견뎌야 한다. 좋은 습관이란 아무리 몸에 익어도 의식적으로 애써서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쁜 습관은 그렇지 않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것처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몸에 붙는다. 심지어 언제 내 몸이 그런 행동을 시작했는지 의식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몸에 붙는 것은 쉽지만 멈추기는 힘들다. 나쁜 습관을 버리려면,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할 때처럼 의식적으로 꾸준히 통제해야만 한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가파른 언덕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과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전혀 다르다. 그러니 똑같이 습관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두 가지 행동을 동일한 범주에 집어넣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혼자 와인 한두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집 밖에서는 아무래도 귀갓길 걱정도 있고 해서 마음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여운이 남은 한두 잔을 보충하다가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습관이 되고 난 다음에는 와인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한두 잔이 아니라 반 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고 어떻게 쓰러져 잤는지 모르는 경우도 가끔 생겼다. 당연히 다음 날에는 두통에 시달리고 몸이 무거워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굳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침마다 황폐한 기분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일어나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와인을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몇 번을 결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슈퍼마켓에 가면 저절로 와인 판매대 앞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이런저런 와인 병의 라벨에 적힌 품종이나 제조연도를 읽어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줏빛으로, 혹은 옅은 라임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병들은 어쩌면 그렇게 완벽한 곡선을 지니고 있는지! 그냥 돌아서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마지막으로 딱 한 병이라고 다짐하면서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애써 와인 사는 횟수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건강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어서 똑바로 걷기도 힘들었다. 인터넷에서 증상을 검색해보다 ‘이석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받고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이후 와인 마시는 습관을 끊을 수 있었다. 이석증과 음주가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다 사람들과 어울려 한두 잔 마시면 어지럽고 메슥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끊으려고 애썼던 나쁜 습관이 결국 몸이 거부하니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다.

날마다 와인 마시는 습관을 이어간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좋은 느낌이 더 증폭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맨정신으로 보면 무심하게 넘어갔을 문장이나 흘려듣게 되는 선율이 더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든 사물의 이면에 깊고 신비한 의미가 감춰져 있는 듯 느껴지던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책상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달콤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몸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나이 들고 노년기를 코앞에 두면서 점점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몸의 신호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이틀 잠들지 않고 시험 공부를 하거나,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몸이 우리의 의지나 감정에 따라주었고, 견뎌주기도 했다. 물론 나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거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의 욕망과 감정이 격렬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충분히 받쳐주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몸이 달라졌는데 마음이 착각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마음은 과거의 빛나는 경험을 쉽게 잊지 못한다. 이제는 다른 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의 지혜를 배우고 행동을 모방하려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따라 하려 애쓴다. 이따금 나는 스스로 묻는다. 젊은 시절이 지금보다 더 행복했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아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외모나 건강한 신체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그때 좀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회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나 자신이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온갖 억압과 저임금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한다면,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굳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여전히 가능한 일 아닐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던 일들을 조금씩 정리하고, 하고 싶었으나 이제까지 못 했던 일들을 하면 어떨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 위해 이런저런 인문학 강좌를 듣기도 하고 장편 소설 읽기 세미나나 독서 모임 같은 곳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강좌나 모임에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만날 일이 없던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와 학력과 직업이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니, 일신상의 정보나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새로운 유형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다른 삶’이었고, 무의식 속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아쉽게도 새로운 대화 이상의 깊은 교류를 맺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수강한 철학 강좌의 강사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약속하는 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렵고도 세세한 설명은 듣고 곧 잊었으나, 사례로 들었던 강사 자신의 이야기는 잊을 수 없었다. 그분은 15년 전쯤 건강이 나빠져서 요가를 배웠는데 놀랍게도 건강이 점차 좋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매일 요가를 하겠다고. 그날부터 그분은 정말로 하루도 빠짐없이 요가를 했다고 한다. 자그마치 15년 동안!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매우 놀랐고, 설마 하루도 안 빠졌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플 수도 있고 너무 바쁠 수도 있고 그냥 까맣게 잊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빠지지 않고 매일 요가를 했으니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하는 나’라는 구절이 내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몇 달 전 허리 통증이 심각해지면서 아침마다 간단한 스트레칭에 가까운 요가를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일주일에 적어도 네다섯 번은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요가를 하면 저녁 무렵에는 반드시 한 시간쯤 동네 공원을 걷게 된다. 이상하게도 요가를 하지 않은 날에는 걷는 운동도 내키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확실히 관성이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규칙적으로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뭔가 큰 변화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년이란 찬란하거나 아름다운 성취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록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의무적으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본문과 달리 맘 편히 설렁설렁 읽을 수 있는 보너스 같은 내용이 담긴 게 부록일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부록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본문보다 치열하게 부록을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바람은 적절하게 독립적이고 적절하게 치열한 노년이다.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가능한 한 하지 않고, 습관을 거스르는 새로운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고 싶다. 직업 탓인지 성향 탓인지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과 교류가 적었고 인간관계가 편협했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폭을 넓히고 싶다. 주위에는 이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거나 만나고 싶지 않다는 친구들이 가끔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만으로도 피로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낯선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다. 평생 직접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책 속의 인물과 더 가깝게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만남을 후회하지는 않으나 내가 놓쳤던 경험을 한번 붙잡아보려는 시도는 하고 싶다. 나이나 계층이나 직업 같은 경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현실의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또한 홀로 생활하는 데 어렵지 않도록 건강에 큰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몸을 잘 돌봐야 할 것이다. 가벼운 운동을 계속하고, 생활하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집안일도 손에서 놓지 않을 작정이다. 죽을 때까지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내가 사는 집을 청소하고, 내가 입을 옷을 손질하는 게 나의 목표이면서 약속이기도 하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이따금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다. 너무 큰 욕심일까?

‘약속하는 나’라는 구절은 나에게 와서 ‘좋은 습관을 유지하는 나’로 바뀐 것 같다. 흔히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알고 보면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정체성은 주위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오래 지속되어온 나의 습관적 사유와 행동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비탈진 언덕길을 날마다 한 걸음씩 힘들게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풍경이 변화하는 지점이 나타날 것이다. 습관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믿게 되는 순간이다. 약속하는 내가 미래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겠다.

<이 기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2021년 9월호(VOL.81)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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