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골퍼 김용준 칼럼]
누가 그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감히 이야기하는가? 천만의 말씀, 그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베른하르트 랑거(Bernhard Langer)의 이야기다.
2019년 11월 10일.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 2019 시즌 마지막 대회인 ‘찰스 슈왑 컵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가 펼쳐졌다. 먼저 경기를 마친 스콧 매캐런(Scott McCarron)은 클럽 하우스 식당에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이 대회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그때까지 시즌 누적 포인트는 1위. 뒤쫓아오는 선수 중 포인트 높은 선수들이 우승만 하지 않으면 2019 시즌 챔피언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매캐런은 함께 TV를 보고 있던 아내를 간간이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시즌 종합 성적 2위 자리에만 머문 게 벌써 몇 번째인가? 2018년 시즌에도 포인트 1위를 달리다가 막판에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매캐런을 번번이 좌절하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랑거. 이날도 그가 우승하면 매캐런은 또 한 번 쓴잔을 마실 판이었다.
시즌 마지막 대회 막바지. 랑거가 선두를 바짝 뒤쫓았다. 그때 매캐런은 또다시 악몽이 되풀이되는 건 아닐까 하며 얼마나 초초했을까? 랑거는 세 홀을 남기고 선두와 한 타 차까지 따라붙었다. 드디어 들어선 마지막 홀. 여기서 버디를 잡으면 공동 선두가 될 수 있었다. 티 샷은 잘 갔다. 잘하면 투온할 수 있는 거리. 다만 그린 오른쪽이 패널티 구역(물)이라 위험해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끊어 가자니 그다음 샷으로 버디 찬스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랑거는 긴 클럽을 잡았다. 그랬다. 그는 승부사였다. 두어 번 연습 스윙을 하더니 시원하게 클럽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런! 피니시가 약간 엉거주춤했다. 등과 허리가 불편해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시 나는 골프채널코리아에서 이 대회 중계 해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누가 우승하길 바랐는지는 물어보나마나다. 그렇다. 바로 랑거다. 챔피언스 투어의 절대 강자인 ‘독일 병정’ 베른하르트 랑거. 그래서 그가 찰스 슈왑 컵 2019 시즌 챔피언까지도 거머쥐길 바랐다. 랑거의 18번 홀에서 세컨샷한 볼은 날아가면서 점점 오른쪽으로 밀렸다. 그쪽은 물인데. 결국 그린에 살짝 미치지 못하고 물에 빠졌다. 그렇게 랑거는 그 대회와 2019 시즌 전체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 그 순간 클럽 하우스에서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매캐런의 시즌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국내 언론 몇 곳은 “랑거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제목으로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 최종전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 제목에 기분이 상했다. 샷 하나가 가른 결과를 갖고 랑거 시대가 끝났다고 쓴 언론이 괘씸했다. 랑거가 그 시즌을 어떻게 보냈는지 안다면 그들은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랑거는 지난해 시즌 두 번째 대회인 오아시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보기 좋게 출발했다. 바로 전주에 열렸던 첫 대회, 미쯔비시 챔피언십에서도 3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어진 몇몇 대회에서도 ‘톱 10’에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2019년 역시 랑거의 해가 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랑거는 1957년생으로 2019년 시즌 때 만 62세였다. 그런 그가 쟁쟁한 영건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골프 팬들은 다 아는 얘기이지만 PGA 투어 챔피언스는 시니어 투어로 만 50세부터 참가한다. 2019년 랑거의 성적엔 변곡점이 있었다. 4월 말부터 갑자기 성적이 저조했다. 같은 달 하순에 열린 대회 두 개는 참가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슬슬 “랑거 시대가 기울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바로 직전에 그가 만든 대기록 때문이었다. ‘마스터스 골프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이 그것이다. 그는 2019년 4월 13일에 끝난 2019 마스터스 대회 2라운드에서 이틀 합계 1언더 파를 쳐서 당당히 컷오프를 통과했다. 내로라하는 여섯 명의 젊은 선수들이 탈락한 그 대회에서 말이다. 첫날에는 71타, 둘째 날에는 72타를 각각 기록했다. 그의 나이 만 61세 7개월 때였다. 그는 이어서 남은 이틀을 지독한 난코스와 싸웠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다 안다. 랑거의 최종 성적은 컷 통과한 선수들 중 최하위였다. 랑거가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세운 2019 마스터스 대회에서는 타이거 우즈가 우승했다. 워낙 큰 뉴스여서 랑거가 선전한 얘기는 밑으로 묻혀버렸다. 랑거는 그 주에 얼마나 진을 뺐는지 두어 주 쉬고 나서야 시니어 투어로 돌아왔다. 그러곤 한동안 맥을 못 췄다. 부진은 몇 달간 이어졌다. 마스터스 대회에서 선전하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웠던 나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랑거의 골프가 진짜 석양길로 접어드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2019년 7월 25일부터 나흘간 영국에서 열린 ‘2019 더 시니어 오픈 챔피언십’에서 또 우승했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대회까지 맹추격에 나섰다.
랑거의 도전은 2020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첫 대회에서는 공동 4위를 기록했다. 이 글을 독자가 읽게 될 때쯤에는 시즌 첫 우승을 할지도 모른다. 거장의 시대는 결코 쉽게 저물지 않는 법이다. 시니어가 됐다고 뜨거운 열정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