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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기⑤ 태조 왕건과 나주

기사입력 2018-08-20 14:30

고려 태조 왕건의 장화왕후 고향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지방호족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화합책으로 혼인정책을 펼쳐 모두 29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중 첫째 정부인 신혜왕후 유씨와 둘째 장화왕후 오씨는 왕건이 즉위하기 이전에 결혼한 부인들인데 그중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 사람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 휘하의 장수 시절, 견훤의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면서 후백제의 후방 깊숙이 있는 나주를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수차례 들고 나면서 나주를 차지한 왕건은 913년 철원으로 돌아와 백관의 우두머리인 광치나에 오르게 된다.

왕건과 장화왕후 사이에 태어난 무(武, 2대 혜종)가 912년생이니 910년을 전후해서 나주에서 오씨 처녀를 만난 것으로 추측되는데 전남 나주의 완사천(浣紗泉)은 그들이 만난 곳이다.

완사천은 전남 나주 시청 앞 300m 지점, 국도 13호선 주변에 있는데 원래 작은 옹달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만남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완사천(浣紗泉), 시 청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석벽을 쌓았다. 이 일대에는 흥룡사(興龍寺)와 혜종사(惠宗祠)란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흥룡사는 장화왕후의 오씨(吳氏) 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터에 혜종을 낳은 인연으로 창건된 것이라 하며, 혜종사 역시 조선 중기까지 혜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김신묵 동년기자)
▲완사천(浣紗泉), 시 청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석벽을 쌓았다. 이 일대에는 흥룡사(興龍寺)와 혜종사(惠宗祠)란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흥룡사는 장화왕후의 오씨(吳氏) 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터에 혜종을 낳은 인연으로 창건된 것이라 하며, 혜종사 역시 조선 중기까지 혜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김신묵 동년기자)

태조 왕건이 궁예의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서 목포(지금의 나주역 일원)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서려 있어 신기하게 여겨 가보니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하여 천천히 마시도록 한 것이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끌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이분이 곧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무(武)가 후에 고려 2대 왕에 오른 혜종(惠宗)이다.

▲물 한 그릇을 청하는 장군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워 건네는 처녀 오씨의 조형물. 그 옆에는 장화왕후 오씨 유적비가 크게 세워져 있다. 이 버들잎 설화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만나는 이야기와 같은데 모두 개국 군주와 왕비와의 만남을 신비화한 설화로 보인다.(김신묵 동년기자)
▲물 한 그릇을 청하는 장군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워 건네는 처녀 오씨의 조형물. 그 옆에는 장화왕후 오씨 유적비가 크게 세워져 있다. 이 버들잎 설화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만나는 이야기와 같은데 모두 개국 군주와 왕비와의 만남을 신비화한 설화로 보인다.(김신묵 동년기자)

그런데 고려역사를 조금 더 살펴보면 태조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는 미미한 가문 출신으로 왕비가 되었으며 정비 신혜왕후가 후사가 없어 자신의 소생이 2대 왕 혜종이 되었지만 극렬한 권력투쟁에 시달리다가 즉위 2년 4개월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혜종의 별명이 ‘주름살 임금’이었는데 그의 반대파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이야기로 추정된다. 유난히 주름살이 많았던 것을 장화왕후의 출신이 미천한 것과 연결 지어 험담하는 것으로 그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는 주장과 함께 권력에서 밀어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혜종은 재위 내내 위협에 시달리며 수모를 감수하고 있었으니, 혜종에 대한 험담 수준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도 기록될 정도로 위태로운 자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에 왕건이 오씨 처녀와 동침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그녀를 불러 동침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이에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가 그것을 즉시 흡수하였으므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가 곧 혜종이다.

이에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아무리 실권이 없었다 해도 일국의 국왕에 대해 이렇듯 기록하고 공공연히 불러댈 만큼 무시할 수 있는 것인지는 믿기 어렵다.

결국 혜종의 후사는 왕건이 즉위하여 맞이한 세 번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 정종과 광종으로 이어져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는 태조 왕건이 젊은 장수 시절 장화왕후를 만나 인연을 맺은 곳이며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이 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니, 나주는 고려왕조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후에 혜종이 태어난 지역을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고 전설 속의 샘을 완사천이라 하였다. 그 부근에 흥룡사(興龍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흥룡사에는 혜종의 소상(塑像)을 모신 혜종사(惠宗祠)가 있었으나 1429년(세종11) 이안관 장득수가 혜종의 소상과 진영을 옥교자에 모시고 서울로 떠났다는 기록(錦城日記)으로 보아 이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성종 2년(983)에는 전국 12목(牧) 중 하나로서 나주목이 되어 5개 군과 11개 현을 다스렸다. 현종 9년(1018) 8목으로 개편되면서 오늘날 전남 지방에서는 나주만이 유일하게 목으로 남아 중심지역이 되었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의 고향이자 2대 왕 혜종의 탄생지 나주와 고려는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을 가진 곳이다.

이렇게 전라도 도명(道名) 제정 1000년을 맞아 그 첫 순서로 전라도의 큰 고을 나주(羅州)에 대한 문화유산 답사를 간략하나마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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