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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닮은 백합꽃 향 내음

기사입력 2019-07-22 08:42

[커버스토리] PART 07 인생의 내음, 향기를 부르는 이야기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아버지의 향기가 무척 그리워진다. 1950~60년대의 척박한 농촌에서 살면서 억척스럽게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8남매를 낳아 오순도순 가정을 꾸려 열심히 사셨다. 농사일의 고단함을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잘 견뎌내던 아버지는 유난히 백합꽃 향기를 좋아했다.

집 마당 한쪽 꽃밭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지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꽃은 향기 좋은 백합꽃이었다. 망종(芒種) 때가 되면 피기 시작하는 백합꽃은 온 집 안을 진한 향기로 물들이고 집 앞 100m 밖까지 향을 퍼뜨렸다.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일을 끝내고 지쳐서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마당에 피어 있는 백합꽃 앞에서 한참을 머무르다가 들어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함초롬한 모습의 백합처럼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던 분이었다. 어린 내 가슴속까지 스며들던 백합꽃 향기는 고향의 앞마당이었고 아버지의 너른 가슴이었다.

바닷가 근처 마을에서 살던 어느 날 밤, 술에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번쩍 들어 소 잔등에 태웠다. 그러고는 당신도 올라타 내 뒤에 바짝 붙어 앉아 냅다 소리를 지르면서 소를 몰기 시작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에 반짝이던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태우고 가던 소는 불과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와 나를 모래사장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빨리 가라고 재촉하던 아버지가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소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는데, 놀란 소가 갑자기 엉덩이를 번쩍 치켜들더니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괜찮냐?”

아버지는 한마디하시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도 아버지에게서는 술 냄새 대신 백합꽃 향기가 났다. 그 뒤 도시로 나온 나는 어렵게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을 뻔히 알고 있어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고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쌀 한 가마니를 지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날 밤 나는 셋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며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초로(初老)의 아버지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가득했다. 생활에 찌든 모습은 더 이상 백합꽃을 사랑하시던 그 시절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군에 입대한 형이 첫 휴가도 나오지 못한 채 전사 통지서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평소 근엄하고 오르지 못할 큰 산이었던 아버지. 난생처음 들었던 처절한 울음소리는 나를 혼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백합꽃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놓으시면서 또 한 번 통곡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두고두고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올해 현충일에도 나는 백합꽃 한 다발을 사 들고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을 찾았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던 20대 초반의 형이 누워 있다. 나는 어느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형에게 백합꽃 한 다발을 바쳤다. 백합꽃 향기를 맡으면 아버지 냄새가 난다. 아버지의 나이를 살고 있는 내게도 그 냄새가 배어 있나보다. 언제부터인가 백합꽃 향기가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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