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비현실적으로 올라가니 세상도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모든 사물이 흐느적거리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이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이 이해될 지경이다. 문득 카뮈가 겪었던 모로코의 더위가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극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렇게 얼굴을 찡그렸던 건 바로 그 황야의 불쾌지수 때문이었으리라.
어디를 간다는 것도 엄두가 나질 않고 집에 있자니 전기료 걱정에 에어컨도 마음대로 켤 수 없다. 저잣거리에서 들리는 소문은 온통 흉흉하고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남쪽 바다는 바닷물 온도마저 30도를 넘어 양식 중이던 물고기가 떼로 죽어 나간다는 소식이다. 예전에는 이런 때가 되면 TV에서 납량특집도 많이 하더니만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하기야 사는 현실이 하루하루 납량특집이니 흥도 안 나리라.
그나마 요즘 마음속 납량특집 삼아 찾아보는 프로그램이 나영석 PD가 만드는 ‘꽃보다 할배’라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 프로가 처음 시작한 때부터 등장하는 할배들에게 감정 이입해가며 즐기다 보니 어느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에 방영되는 베를린, 체코, 오스트리아 편을 보니 세월의 흐름이 완연히 느껴진다. 할배들의 기력이 여전만 못함이 드러나 마음이 짠하다.
이 프로그램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주는 재미다.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갖가지 연출되지 않은 모습과 행동들로 멀게만 느껴지던 배우들의 삶이 우리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드라마로 형성됐던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들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 극 중 역할 때문이겠지만, 매우 날카롭고 깐깐해 보였던 박근형이 의외로 로맨티시스트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순재 할배는 ‘직진순재’라는 별명처럼 여행 초기 일행을 벗어나 항상 돌출행동을 하여 시청자들을 걱정시켰지만, 그것이 끊임없는 지적인 호기심 때문임이 밝혀지면서 나이를 잊고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던 초기의 활달함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체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행을 배려하는 마음이 원숙해진 이유도 있으리라.
가장 변화가 많은 문제가 있는 캐릭터는 바로 백일섭이다. 초기에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불편한 몸 때문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불편함이 심해져 시청자들을 오히려 불편하게 한다. 두 번의 수술로 불어난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그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과장 행동이 안쓰럽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무엇보다 김용건의 등장이다. 배우로서 몰랐던 그의 진면목이 만천하에 드러나 시청자를 즐겁게 했다. 그의 끊임없는 유머와 농담은 자칫 지루해질 가능성을 차단하고 여행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울러 그의 시선은 드라마의 균형을 잡듯이 조용한 신구와 소외된 백일섭을 부축하고 견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윤활유로서 유머의 가치를 입증한다. 여행 파트너로 우리 식구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선택했다.
프로가 방영되는 한 시간 반 동안 알프스 자락에 자리한 잘츠부르크의 풍광과 볼프강 호수, 그리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장소를 할배들과 함께 다니느라 더위를 잊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우리 할배와 한번 다녀와야지.’ 나만의 즐거운 납량특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