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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虛像)의 배려(配慮)

기사입력 2017-12-26 16:10

이제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월요일 날 아침에 당구장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사락사락 내리던 눈이 5분여를 걸어가니 엄청나게 퍼부었습니다. 금년 들어 서울지역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은 어둠침침...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걸었는데, 기분은 좋았지요. 문득, 군 복무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현역으로 군복무 하던 시절에 설악산 후사면 '선유실리'라는 곳에서 근무했는데, 그해 겨울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골짜기마다 내린 눈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은 내려도 밥은 먹어야 하니 보급로 확보 차원에서 내리는 즉시 눈을 치우곤 했습니다. 내리는 눈은 아름답지만 치울 때는 정말 힘이 들었지요. 병사들이 모두 동원되어 넉가래, 빗자루 등, 제설도구를 총 동원하여 온종일 뼈 빠지게 눈치우고 돌아오면 온 몸이 노곤하고 만사가 귀찮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하염없이 내린눈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 쌓였습니다. 눈이 온다고 좋아하며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눈사람 만들어 모자 씌우고 목도리 걸어주던 시절은 그저 꿈 많던 어린 시절의 얄궂은 낭만일뿐이었지요. 어쩌겠습니까? 무슨놈의 운명의 장난이 이리도 짓궂단 말입니까? 그래서 눈치우는것도 전투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제설도구를 들고 눈치우러 나갔습니다. 어차피 오늘 치우고 나도 내일 또 올 눈이지만 열심히 치울수 밖에 없었지요. 아마도 대한민국의 남자들이라면, 군복무를 마친 분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실 겁니다.

군 시절을 추억하다보니 '이등병과 인사계' 라는 제목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한 이등병이 몹시 추운 겨울날 밖에서 언 손을 녹여 가며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소대장이 그것을 보고 안쓰러워하며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김 이병,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다가 하지.” 그 이등병은 소대장의 말을 듣고 취사장에 뜨거운 물을 얻으러 갔지만, 선임에게 군기가 빠졌다는 핀잔과 함께 한바탕 고된 얼차려만 받아야 했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와 찬물로 빨래를 계속하고 있을 때 중대장이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김 이병, 그러다 동상 걸리겠다.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서 해라.” 신병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이번에는 취사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 봤자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혼만 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빨래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중년의 인사계가 그 곁을 지나다가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김 이병, 내가 세수를 좀 하려고 하니까 지금 취사장에 가서 그 대야에 더운물 좀 받아 와라!.” 이등병은 취사장으로 뛰어가서 취사병에게 보고했고, 금방 뜨거운 물을 한가득 받아 왔습니다. 그러자 인사계가 다시 말했습니다. “김 이병! 그 물로 언 손을 녹여가며 해라. 양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동상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소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인사계 3명의 상급자 모두 부하를 배려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정말로 부하에게 도움이 된 것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일방적인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에게 도움을 줬다고 혼자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배고픈 소에게 고기를 주거나, 배고픈 사자에게 풀을 주는 베려는 나의 입장에서 단지 내 만족감으로 하는 허상의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배려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나만의 만족감이 아닌 진정한 배려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눈 오는 날, 잠시 지나간 추억을 상상해 본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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