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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흘러도 마음은 그대로

기사입력 2017-05-05 19:27

[그 사람, 참 괜찮았었는데…]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에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얼마나 울렸을까. 급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이경숙씨 댁 맞나요?”

“○○여고 나온 그분 맞으세요?”

익숙한 목소리. 뒤이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기억이 나냐고 물었다. 순간 30여 년 전 시간들이 확 몰려왔다. 그와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서클에서 활동을 했다. 광화문 근처 4개 학교의 학생들 30여 명이 회원인 서클이었다.

필자가 처음 서클에 들어간 날이었다. 게임을 하다 걸려 벌칙으로 노래를 하게 되었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한 남학생이 불쑥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저분이 좋아서 대신 노래하겠습니다. 마침 오늘 배운 노래가 있거든요.”

그러고 나서 부른 노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었다. 그런 노래는 잘 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노래 제목도 그랬고, 또 그가 필자 대신 나서서 말하는 것이 민망했다.

또 어느 날이었다. 남학생들의 방송축제가 끝나고 모두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의 집은 부자였다. 어머니가 차와 과일을 들고 거실로 들어서자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 엄마, 장래 막내 며느릿감 데려왔어요.”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 행동에 모두들 놀랐다. 필자는 물론 그의 어머니도 어이없어했다. 그 후 필자는 서클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졸업 앨범에서 주소를 찾았다며.

우린 명동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세련된 옷차림에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그 뒤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그는 필자에게 전화해서 드레스 코드를 알려줬다. 오늘은 어디 갈 것이니 정장으로 입고, 어느 날은 청바지를 입으라고 했다.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필자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 그는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우월감 또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 듯했다. 종종 기분이 상했다. 그가 먹어본 음식을 몰랐고, 그가 입은 옷의 라벨이 생소했고 그가 다니는 고급스러운 장소도 거북했다.

어느 날 우리는 명보극장에서 <7인의 신부>를 보고 찻집에 들어가 앉았다.

“나 너 그만 볼래.”

“나를 차는 거니?”

눈물을 뚝뚝 흘렸고 필자가 내민 손수건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렇게 헤어졌지만 며칠 뒤 집 근처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가 불러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조용히 서 있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그가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연락하지 못했다. 대신 몇 번이고 우연히 만나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많이 아팠지만 서서히 그를 잊었다.

그런데 30년 세월이 지난 뒤 그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하루도 잊은 적 없었다는 말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가슴이 뛰었다. 환했던 모습과 미소,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며 필자는 어느새 대학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풋풋한 향내가 코끝에서 감돌았다.

그래도 우린 여기까지다. 서로에게 “잘 살자”는 말을 하며 함축된 모든 의미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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