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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가슴 아픈 사람! 그 이름 ‘소 다케유키’

기사입력 2016-08-26 16:27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 (김영선 동년기자)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 (김영선 동년기자)
소 다케유키는 1908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0년, 소 가문의 당주인 사촌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15세의 나이로 대마도 번주인 소 가문의 37대 당주자리와 백작 작위를 계승하게 된다.

일본의 음모

일본정부는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를 결혼시켜 일본의 화족에 편입시켜, 조선 왕족으로서의 영향력을 지워 없애려고 했다. 덕혜옹주를 조선인들의 기억에서 지워 저항의 구심점을 없애려고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이방자여사는 그녀의 회고록에서 ‘조선의 피를 무리하게 억지로 일본의 피 속으로 동화시켜 버리려하는 일본정부의 의도에 대하여 자신도 슬며시 반발심을 느꼈다’고 하였다.

소 다케유키는 1928년 도쿄대 영문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2년 뒤, 덕혜옹주를 처음 만나 맞선을 보고, 1931년 졸업한 그해 5월8일, 소 다케유키의 도쿄저택에서 일본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는 이렇게 일본정부에 의해,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덕혜옹주는 이때 이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이방자여사의 회고록에 ‘덕혜옹주가 많이 안정되었으며 식사도 잘하고, 말도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소 백작과의 결혼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는 것과 함께 덕혜옹주의 병이 재발 할까봐 걱정하는 기록이 있다.

조선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혼

그는 ‘대한제국’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를 부마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소 다케유키가 일본인, 거기다가 옛날에는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신분이 낮은, 그래서 조선이 늘 업신여기던 ‘대마도’사람 이라는 것이, 조선인들에게는 그를 부마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조선일보 기사다.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통분했고, 조선일보는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을 기사로 내보낼 때, 그녀의 결혼사진에서 신랑 소 다케유키의 모습을 지우고, 덕혜옹주만 나온 사진을 기사와 함께 실었다.

덕혜옹주와 이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본사회에도 변화가 생겨, 헌법을 새로 만들면서 화족제도를 폐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소 다케유키는 백작지위를 잃게 됨과 동시에, 그동안 받아오던 일본정부의 지원도 끊겼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하인들을 다 내보내고 그는 집을 팔고, 작은집으로 이사를 했다. 덕혜옹주를 돌볼 사람이 없어 1946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딸 정혜가 결혼하여 분가한 해인 1955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가 ‘덕혜옹주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몹시 비난 하였다.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다’

그가 후에 수필집을 냈는데, 어린시절, 가족관계, 그리고 그의 인생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다’라는 단 한 줄의 글만 남기고는 함구하였다. 그가 덕혜옹주와 함께한 시간들을 누가 감히 언급할 수 있겠는가! 그의 시 『사미시라』에 덕혜옹주를 그리워하며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

빛 바랠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 있는 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 없는 사람이여.  

.......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

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지 이미 오래 인 것을,  

.......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 주실 수 없는지요.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

현실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덕혜옹주는 결혼 할 때부터 이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세상에서 헤매는 그녀의 영혼을, 소 다케유키는 만날 수 없어 늘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살았던 것이다.

소 다케유키는 1972년, 낙선재에 찾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측근들은 이를 거부한다. 결국, 덕혜옹주를 만나보지 못 한 채, 그는 1985년 4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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