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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의 맛

기사입력 2016-07-25 12:42

▲필자의 서예작품. (손웅익 동년기자)
▲필자의 서예작품. (손웅익 동년기자)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반에서 글씨 잘 쓴다는 두 녀석이 누가 더 잘 쓰는지 글씨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필자였다. 친구들은 우리 둘 주위를 빼곡히 둘러싸고 숨을 죽였다. 우리는 각자 공책에다가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누가 이겼는지 결과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 내내 미화부장을 했고 벽을 꾸미는데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직접 써 넣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손 글씨를 쓸 일이 없어졌다. 이제 글씨를 ‘쓴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두드리는’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글씨를 누가 더 잘 쓰느냐 보다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폰 자판을 누가 더 빨리 두드리느냐 하는 속도가 관심거리로 되었다. 속도에 따라 자격증도 준다. 글씨의 모양이나 크기도 지정하는 대로 만들어 진다. 누군가 계속 멋진 글씨 모양을 만들어 낸다. 개발된 글씨 모양은 돈을 주고 사야 된다.

글씨를 두드리게 되면서 대부분 손 글씨 필체가 망가졌다. 글씨를 써도 모양이 재대로 안 나오므로 더 안 쓰게 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필체는 더 심각하다. 필체도 엉망이지만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판독이 안 되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자기가 써 놓은 글이 무슨 내용인지 해독을 못하는 경우도 봤다.

컴퓨터로 인해 자꾸 손 글씨를 멀리하게 되고 필체가 망가지는 것이 아쉬워서 필자는 최근에 캘리그라피 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나 간단한 기록정도만 손 글씨로 쓰면서 겨우 글씨체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글씨 공부를 하면서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화선지를 앞에 두고 생각으로 미리 써 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쓸 지, 여백은 어떻게 둘 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먹을 찍는다. 글씨는 손에서 나오지만 온 몸으로 쓴다. 쓰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앞 사람에게 계속 인사하며 졸 정도로 힘든걸 보면 온 몸으로 쓰는 게 확실하다. 그렇게 몇 달 공부해서 일단 자격증 하나를 추가했다. 글씨를 두드려 만드는 속도자격증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자격증이라고 생각하니 글씨를 쓰는데 좀 더 신중해졌다.

글씨와 그림은 맥락을 같이한다. 요즘에는 글씨를 그림처럼 쓰고 그림과 조화롭게 쓰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 아직 작품으로 내 놓기는 부족하지만 좋은 시를 골라 쓰고 작은 액자를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쓰는데 더 신중해졌다. 쓰는 동안 잡념이 사라진다. 집중하는 시간도 좋다. 그동안 잊고 있던 손 글씨 쓰는 맛을 다시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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