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요일이 시제를 지내는 날이라 오랜만에 시제에 참례하였다.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6시 서울을 출발하여 10시쯤 선영에 도착하였다. 증조부모님부터 조부모님 그리고 백부모님 순서로 인사를 드린 후에 시제를 지내고 나서 옛날 조부모님께서 사시던 고가로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사촌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시제에 참여하신 집안 당숙과 숙모님, 그리고 형님뻘 되시는 나이든 형님 및 형수님들과 함께 자리하니 객지생활만 하던 나도 고향이란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사촌 큰 형님이 양자로 갔으나 같은 집안이라 여전히 시제 준비를 제수씨들과 함께 형수님께서 주로 하신 것 같다. 마침 바로 밑의 사촌 동생이 시골로 귀향하여 옛날 고가를 수리하여 생활하고 있으니 마치 옛 어른들을 뵙던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봄날 새싹 돋아나듯이 생각났다.
건너 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던 곳이었다. 기침을 유달리 많이 하시면서도 족보관련 말씀을 즐겨 해주셨던 할아버지, 만석궁의 딸로 시집와서 고생하시면서 지내셨지만 항상 우아한 모습과 여유를 지니셨으나 동네 아시는 분들에게 부족한 손자 자랑은 부끄러움 없이 꽤 많이 하셨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자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그분들의 체취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우리 아버지가 효자이셨기에 나도 가끔 그런 흉내를 내려고 해왔다. 사탕을 드리면서 누워 계실 때 책을 읽어드리거나 안마해드리면 즐겨하시던 모습, 소원을 여쭤보고 해결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던 기억들이 눈물 속에 아롱거렸다.
우리 선영은 월출산을 마주보며 위치해 있어 산을 좋아하셨던 옛날 선비들의 취향에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공자도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으니 선조께서는 물과 산을 함께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마 그분들은 해마다 이때쯤 산 아래서 실시되는 왕인박사 관련 축제행사도 다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다.
14대 선조께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시어 계시다가 귀경 후에도 4형제의 막내아들인 우리 직계 선조인 후(後)자 경(庚)자 할아버지께서 영암의 최 씨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시어 계속 사시면서 일가를 다시 일으키신 곳이다. 연전에 14대 조부께서 사시던 생가와 한석봉 등을 제자로 학문을 가르치던, 그리고 조선시대 이이 율곡과 같은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이우당을 방문하였던 생각이 난다. 결과 지금은 반상의 구별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옛 어르신들로부터 이 지역 최고의 가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바로 위 형님이셨던 선(先)자 경(庚)자 할아버지는 지금 서울 오금 공원에 영면해 계시고 그 비석은 시울시 문화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위의 두 분 할아버지 선(先)자 갑(甲)자 와 후(後)자 갑(甲)자 할아버지는 서울 수락산의 선산에 영면해 계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서울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고 조상님과 함께 하기 위함인 것도 같다. 이름이 비슷하여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 분은 쌍둥이셨다. 그래서 어쩌면 약간은 의도적으로 우리 직계 할아버지가 결혼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 영혼의 고향은 달이 처음 비추는 곳이라는 바로 월출산의 정기가 서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