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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인천상륙작전 격전지를 가다... (2)월미산은 말이없다.

기사입력 2016-06-07 10:46

▲전망대에서 올라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필자. (김종억 동년기자)
▲전망대에서 올라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필자. (김종억 동년기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천포구. (김종억 동년기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천포구.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전통정원 안에 있는 연못 부용지.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전통정원 안에 있는 연못 부용지. (김종억 동년기자)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갑자기 북적이는 인파속으로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여기저기 붉은 색으로 장식한 가게와 벽화들, 붉은색 물결이 마치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그들은 붉은 색을 좋아하는 걸까? 중국인들이 홍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붉은색이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국지 벽화거리 인근에 청일 조계지 계단이 나타났다. 조계지(租界地)란 외국인 거주지를 뜻하는데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많은 청국과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곳을 거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배다리이다.

계단위에서 내려다보는 왼쪽이 일본, 오른쪽이 청나라의 조계지라고 하는데, 이 계단을 경계로 좌측엔 청국이 우측엔 일본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계단 위쪽 가운데에 공자의 동상이 서있었다. 그 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차이나타운 중심부를 지나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짜장면과 짬뽕으로 허기를 배를 달래고 월미도를 향해 다시 출발하였다.

월미도 입구 월미전통정원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특히 초입의 양진당은 각종 한국전통체험을 하기 딱 좋았다. 쾌적하고 멋들어진 정원에서 쉴 새 없이 눌러대는 카메라셔터, 월미산 올라가는 발길을 잡는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지난 50여년간의 일반인 출입차단으로 훼손되지 않은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걷다보면 향긋한 나무향기와 새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드디어 월미산 정상에 오르니 인천포구는 물론이고 인천앞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포구에는 군함이 아닌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고 올망졸망한 바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 오르자 인천대교가 코앞에 보이고 바다건너 영종도의 고층아파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종도는 필자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인천과 영종도의 간극이 이렇게나 좁혀졌을까?

긴 호흡을 하고 인천대교 너머 아스라이 가물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긴박했던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렸다.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국군이 후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6월29일 전쟁발발 4일 뒤,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미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치밀한 작전계획과 작전 당일까지 상륙작전 가능한 지역에 폭격을 실시하면서 양동작전을 실시하므로 서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시키고 북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하였다는 점이다.

월미산 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진촬영을 마치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리도 아프고 피로감도 몰려왔지만 기분은 꽤나 괜찮았다. 50여년 만에 추억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해서 행복했고, 특히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인천상륙작전지를 답사했다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지하탄약저장고는 이제는 효소 발효음식 저장고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월의 긴 간극을 월미산은 오늘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월미산 정상에 있는 월미 돈대의 화포앞에 선 필자.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산 정상에 있는 월미 돈대의 화포앞에 선 필자.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산 정상에서.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산 정상에서.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산 전망대위에서 포즈를 위하고 있다. 오른쪽이 필자. (김종억 동년기자)
▲월미산 전망대위에서 포즈를 위하고 있다. 오른쪽이 필자. (김종억 동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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