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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 이야기] 1948년生,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온 67년

기사입력 2015-12-22 10:10

197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노신사가 신문에 난 부음을 보고 빈소가 마련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였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신세를 많이 지었다며 이를 잊지 못하여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 우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글>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일제 말기에 선친은 종로 2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자가 고장 난 기계가 있으면 수리하겠다고 아버지 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남자의 용모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를 한 잔 대접하며 사연을 들어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철원이며 배재학당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른 후 상해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하며 이승만 박사를 돕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49년 이철원 박사가 아버지에게 급한 연락을 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는데 입고 갈 양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바로 양복과 모자를 해주었다. 그는 얼마 후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 박사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지금은 자신도 은퇴를 하였지만 도와줄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얘기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그 이듬해 형 결혼식의 주례를 이 박사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유신체제하라 긴 주례사를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 형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왼쪽). 아버지 故손세원.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왼쪽). 아버지 故손세원.


아버지의 세대가 있기에 우리 세대가 있다

요즘 나는 이철원 박사의 아들 이준일 교수(전 중앙대 정경대학장)와 우리 둘 다 회원으로 있는 광화문문화포럼에서 매달 만나 선친들의 우정을 회고하며 2대에 걸친 세교(世交)를 이어가고 있다.

선친 이야기로 ‘우리 세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또 아버지 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1948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태어나지 않아 이등 황국신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군대도 대한민국 군대에 가고 나중에는 고위 공무원도 될 수 있었다. 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만 한살이라 어머니 등에 업혀 고생을 모르고 피난을 갔다 올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시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내가 태어난 해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해이다. 그러니 나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4·19와 5·16을 목격했고 그 후 오랜 권위주의 정부 후에 온 1987년 민주화, 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등을 국내외에서 지켜보며 대한민국의 변화된 국제적 위상을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그사이 원조대상국에서 원조공여국이 되었다.


4·19 총성과 시민들의 울부짖음

나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육성 연설을 라디오로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데 6학년 때 수업 도중 내가 다니던 수송국민학교(현재의 종로 구청자리)에서 멀지 않은 세종로에서 총성이 울려 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야했는데, 그의 차량이 떠나는 연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새벽잠이 없던 아버지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우리 형제들을 깨웠다. 종로 2가에 나가보니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다. 라디오는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육성 성명을 보도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 집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고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개한 것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들 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끼워 대문에 걸었다. 지금은 병원에서 출산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 시절에는 집에서 해산하고 집에서 초상을 치렀다. 그래서 어느 집에 애경사가 있는 지를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또 집집마다 한자로 된 문패를 걸어 서로 이름을 알고 지냈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바로 앞집 사람의 성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4대문 안인 종로 2가 YMCA 뒷동네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생가 주소는 종로구 인사동 245번지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주소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건물만 남아 있으나 지금은 개조하여 음식점이 되었다.

내 유년 시절의 종로 2가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YMCA 자리는 6·25 때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YMCA 건너편에는 기독교 방송국이 있었다. 종로 1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을유문화사 서점이 있었고 안국동방향으로 돌아서는 모퉁이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1936년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구비한 이 건물은 규모는 다르지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장안의 명물(landmark)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화신백화점은 1987년 종로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데 다른 유서 깊은 외국 도시와는 달리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수려한 자연 경관은 무분별하게 치솟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지고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이런 철거 위주의 도시 계획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없어진 옛날 집 주소와 화신백화점을 생각하며 나는 실향민과 같은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고교 시절인 1966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주최 세계 청소년토론대회(World Youth Forum)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된다. 지금은 조기 유학들을 많이 가지만 그 당시는 고등학생이 미국에 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3개월 여간 뉴욕 지역의 미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면서 그 집 아들들과 함께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 대한 연설도 하고 또 전 세계 39개국에서 온 학생들과의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이때 나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다. 지금은 서울이 글로벌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 당시 한국은 고속도로도 없는 후진국이었다.

▲올해 9월 ‘한불 상호교류의 해’ 엘리제 궁 환영 리셉션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왼쪽 끝은 황교안 국무총리.
▲올해 9월 ‘한불 상호교류의 해’ 엘리제 궁 환영 리셉션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왼쪽 끝은 황교안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

또 그 당시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였다. 전화는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항공우편 중에서도 저렴한 봉함엽서(aerogramme)에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우리 세대에 가장 크게 발전한 기술을 꼽으라면 나는 통신수단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빛의 속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SNS, 무료 국제전화까지 가능하지 않은가.

만 28세였던 1977년 나는 코리아헤럴드 파리지사장 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다. 뜻밖의 인사 발령이었다. 대개 지사장이나 특파원하면 중견 이상의 기자들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의외와 예외가 있다. 나는 이때 프랑스에 2년간 체류하면서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체험하며 프랑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그 후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두 차례 8년을 더 근무하면서 도합 10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며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도 받고 프랑스에 대한 책도 출간하게 된다.

프랑스 지사장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코리아헤럴드의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기자를 겸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아침 6시가 좀 지나서다. 자고 있는데 중앙청에서 전화가 왔다. 긴급 중대 발표가 있으니 빨리 기자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부리나케 중앙청으로 향했다.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이 소문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평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기자들 앞에 나타나 울먹이면서 대통령 시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우두망찰할 사이도 없이 전화로 송고를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했다. 고인을 위한 종교 의식에서 평소 박 대통령을 비판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께서 이제 고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해 나는 외신을 통해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당시 한국 언론의 정국관련 보도는 마치 암호를 읽는 것과 같았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 언론을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1984년 초 연합통신 기자로 있을 때 나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공보관으로 나가 달라는 공직 제의를 받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 근무하는 기회다. 그 당시 나는 미국 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고 장학금도 거의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주저하는 나에게 내가 자문한 선배들은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말라고들 권유했다. 사농공상 문화의 잔재 때문일까. 그 당시 해외공보관 중에는 많은 전직 언론인들이 있었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 남미 순방 당시 수행한 필자(왼쪽에서 세 번째).
▲1996년 김영삼 대통령 남미 순방 당시 수행한 필자(왼쪽에서 세 번째).

그 이후 공무원이 된 나는 자카르타, 파리, 제네바, 오타와 등에서 근무했다. 그리고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대통령 해외 순방에 수행하며 세계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특혜 받은 인생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적을 해외에서 지켜봤다. 1987년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정부 방어에 종사하던 나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 그 이후 나의 공보관 업무는 훨씬 수월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때는 파리에서 서울에 파견되어 외신 홍보 지원을 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프랑스 TV와의 회견에서 나는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국제 사회가 공인하는 축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파리에 대사관 공사 겸 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고 한국문화원을 찾았고 월드컵이 생중계되는 파리 시청 광장에는 교민과 유학생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러 몰려들었다. 우리 가족도 여기에 합류했다.

지난 9월 나는 파리에서 개최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 상호 교류의 해’ 개막행사에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 색채로 조명된 에펠 탑 앞에서 열광하는 파리 시민들과 우리 교민들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공교롭게도 이 개막행사를 한 사요극장은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를 통과시킨 곳이다.

▲손우현 교수의 저서.
▲손우현 교수의 저서.

2007년 이후 나는 한림대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이를 공직 시절에 하던 ‘한국 알리기’의 연장으로 생각하며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 특히 흐뭇한 것은 이제 한국도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올 만큼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간 참 먼 길을 달려왔다. 안으로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나 밖에서는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태어난 나는 이 여정에 국내외에서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 손우현 (孫又鉉)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1948년 서울 출생. 서울고, 한국외대 불어과, 파리 외교전략대학원(CEDS) 졸.

코리아헤럴드 기자, 파리지사장, 연합통신 기자, 주 인도네시아, 프랑스, 제네바,

캐나다 공보관.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정부간행물제작소장,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역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기사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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