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농사? 사람의 땀만으론 힘에 부치는 겨. 하늘이 보살펴주고 자연이 도와줘야 하는 겨.” 당산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틈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일장일단, 하우스재배와 노지재배
우리 농장 건너편 쌍둥이 할머니네 사돈도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 있다는데 “그 짝 집은 (비닐)하우스 재배여. 남들보다 일찍 시장에 내놓는가 벼. 그래서 그런가 엄청 비싼디 엄청스레 잘 팔린다”하고 자랑이 늘어지신다. 우리 밭 블루베리 꽃망울이 하얗게 피어오르면서 벌들이 다녀가는 계절에,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블루베리는 시장에 선을 보인다니 세월을 한참 앞당겨 가는 듯하다.
쌍둥이 할머니는 우리도 하우스재배를 하라며 꼬드기지만(?) 돈 들어갈 걱정이 크고, 그 이유 못지않게 하늘의 햇볕과 비바람 맞으며 작물을 키우는 노지재배를 선호하는 것도 있다. 물론 어떤 재배 방식을 선택하든 장단점은 있기 마련일 터. 노지재배는 큰돈 들이지 않고 시작할 수 있어 초기 비용이 낮다는 점,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제철 작물을 생산한다는 점, 기계 작업이 수월해 대규모 운영에 유리하다는 점 등이 장점인 반면, 장마·태풍·가뭄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하다는 점, 수확시기가 한정적이라는 점, 자연에 노출돼 있어 병충해 관리가 어렵다는 점 등이 단점으로 꼽힌다.
반면 스마트팜으로 알려진 시설재배는 계절과 상관없이 연중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 균일한 환경에서 재배하니 맛과 모양이 일정하고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점, 병충해 예방이 쉽다는 점 등이 장점 리스트에 올라 있다. 반면 초기 투자 비용이 부담스럽다는 점, 자동화 기기나 환경 조절 시스템 등 기술·운영상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 냉난방이나 급수 등을 위한 전기 비용 같은 운영비가 계속 든다는 점 등이 단점이다.
한데 제주도에서 감귤 농장을 운영하는 지인의 경험담에 따르면, 아무래도 노지에서 재배한 과일이 싱싱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 같다고 한다. 덜 무르기도 하는 것 같고. 하기야, 옛날부터 온실의 화초처럼 키우지 말고 들판의 잡초처럼 내버려두라 하지 않았던가. 특히 요즘은 꿀벌 실종 현상이 자주 일어나, 하우스에 풀어 넣을 벌 구하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하니 노지재배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블루베리 꽃이 하얗게 피어오르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벌떼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연의 신비’가 바로 이런 것이려니 싶다.
“호스로 물 주는 거 다 소용음써(없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겨.” 평생 밭에서 살아온 동네 어르신들의 버릴 것 없는 말씀도 노지재배로 기우는 마음에 한몫한다. 빗줄기가 거세게 좍좍 내리는 ‘작달비’보다는 얌전하게 내리며 땅속으로 살포시 스며드는 보슬비가 최고라신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다 거기서 거긴 줄 알았는데 땅에 좋은 비, 식물에 금상첨화인 비, 와봐야 도움 안 되는 비, 하늘에 구멍 뚫린 듯 퍼붓는 무서운 비… 세심하게 나누어 구분하는 평생 농부의 섬세함이 놀랍기만 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흠뻑 몸을 적시고 나면 파릇파릇 이파리 올라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심지어 열매도 비를 맞은 후에야 굵어지니, 이 또한 오묘하기도 하다. 5월이면 블루베리 열매가 아직 크기 전이라 끌탕하곤 하는데, 몇 번 비를 맞고 나면 빗속 질소질 성분 덕분인지 열매들이 보기 좋게 굵어진다. 이 계절이면 비가 부리는 요술에 정신을 빼앗기기 일쑤다.
블루베리는 복숭아·사과·배에 비해 열매 크기가 작기도 하거니와 수분 자체가 적은 과일이라 비 피해가 크지 않음은 다행이다. 물론 오래도록 비를 맞으면 블루베리도 맛이 밍밍해지고, 잘 익은 열매일수록 꼭지를 따라 십자형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열과(裂果) 피해를 보는 것이다. 이래저래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되는 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인 셈이다. 다행히 충청 지역은 큰물도 없고 큰 가뭄도 없다 했는데, 작년 여름엔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크나큰 비 피해를 입었으니 기후 위기의 화살이 야속하기만 하다.

하루 볕이라도 더 쬐었으면 형님이지
농사를 짓다 보면 하늘의 비 못지않게 햇볕의 고마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2년 차 농부 시절, 밭에 서리태(검은콩) 모종을 심으면서 오뉴월 하루 볕의 차이를 두 눈으로 생생히 확인했다. 장날 시장에 나온 모종들을 보면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던 속담의 의미도 저절로 깨우쳤다. 실제로 서리태 모종이 조금 모자란 듯해 이튿날 다시 50개들이 한 판을 더 사 왔다. 그때 불과 하루 차이였건만 어제 산 것과 오늘 산 것 사이에 잎사귀 크기와 키 높이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았다.
어린 시절 오라버니 친구들은 모이기만 하면 자기가 형이라 우기며 서열을 따지곤 했다. 그때마다 밥그릇 차이가 얼만데, 하루 볕 차이가 얼만데 들먹이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결혼해선 자기 마누라는 형수라 부르라 하고, 친구 마누라는 제수씨라 부르던 짓궂은 치기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었던 셈이다.
햇볕의 힘이 의외로 무자비하다는 것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밭에서 일할 때 입는 옷을 통해서다. 누군가는 ‘옷장 열면 입을 옷이 없다’며 투덜거린다지만, 우리 농장은 사정이 좀 다르다. 멋쟁이 주인장이 젊은 시절 입던 옷이 즐비하게 걸려 있으니 말이다. 장롱 가득 걸려 있는 옷은 대부분 작아져서 못 입거나 유행 지나 어색해서 못 입는 옷이 대부분이다. 개중엔 골프웨어도 있고, 전문직 여성에게 어울리는 명품 브랜드 옷도 있다.
그런 옷들이 모조리 밭에서 일하는 내 차지가 되는 건 행운인데, 그 좋은 옷들이 1~2년 지나면 고운 색은 모조리 허옇게 바래고 고급 천 또한 나달나달해져서 픽픽 찢어지는 건 슬픈 일이다. 고약한 햇볕 탓임은 물론이다. 옷장에 쌓아두기보다 누구라도 활용하는 것이 백번 낫다는 생각에 ‘그 좋은 옷들’을 입긴 하지만 솔직히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니다.
사시사철 달라지는 바람도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주인공이다. 두꺼운 외투를 입어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봄바람이 훈풍으로 바뀌는 계절이 바로 5월 아니던가. 이 나이에도 바람결 따라 신록이 나부끼는 모습을 보면 어디론가 멀리멀리 떠나고 싶어지니 못 말릴 일이다. 바람이 불면 살충제나 살균제를 치는 방제 작업은 일시 멈춤이 상식이건만, 초보 농부 시절엔 요령부득했던 탓에 바람 따라 날아오는 농약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이 바람도 적당히 불어줘야 하는데, 땅에 심은 블루베리든 화분에 심은 블루베리든 5월 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건조해지기 십상이다. 멀칭은 풀 관리에도 효과가 있지만 작은 나무의 과도한 수분 증발을 막아주는 노릇도 하기에 신경 써서 해줘야 한다. 조치원에서 블루베리를 몇 그루 키운다는 아주머님이 해준 말.
“제가 블루베리를 좀 아는데요, 혹시 주위에 산이 있으면 솔잎과 솔가지 주워다 덮어주세요. 블루베리 멀칭엔 소나무가 제일이에요. 산도(酸度)도 맞춰주니 일석이조랍니다.”
실은 블루베리 주인장이 소나무도 키우고 있어 솔잎과 솔가지가 즐비하건만, 일머리 없고 게으른 탓에 멀칭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시간에 어울리는 감각과 행동
농사라고는 대학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 농활(농촌 봉사활동) 두 차례 다녀온 것이 전부인 내가 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시간 감각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학생들 가르치던 시절 나의 시간은 봄 학기와 가을 학기로 나뉘고, 여름과 겨울은 적당히 빈둥거리며 방학이 있는 삶을 살았다. 봄보다는 가을 학기가 훨씬 빠르게 지나간다 싶기도 했고, 학부 강의인지 대학원 세미나인지에 따라 마음의 긴장과 몸의 여유로움이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했다.
학교를 떠나면서 오롯이 농사에 전념하고 보니 계절 감각은 훨씬 예민해졌고 요일 감각은 완전히 무뎌졌다. 예전엔 수업이 월·수·금에 있는지 화·목·토(주 5일제 이전엔 토요일에도 강의했다)에 있는지 몸이 귀신같이 기억했건만, 이젠 어제가 며칠이었는지 오늘은 또 무슨 요일인지 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토요일·일요일·공휴일은 사라졌고, ‘비 오시는 날’이 마음 편히 쉬는 날이 됐다. 닷새에 한 번씩 서는 장날을 용케 기억하곤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니 이 또한 새로운 습관이다.
그래도 잃어버린 요일 감각을 되찾기 위해 요즘은 아침마다 날짜와 요일을 확인하고, 어제 한 일과 오늘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산업혁명 당시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던 농부의 몸을 기계의 리듬에 맞춘 노동자의 몸으로 만드는 작업이 의외로 힘들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실감 나게 다가온다.
문득 우리네 특유의 빨리빨리 기질은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곳에서 5000년 이상 농사꾼으로 살아온 자취이자 흔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는 기미가 보이면 마음부터 괜스레 분주해지고 몸도 덩달아 바빠지는 경험이 해마다 반복되니 말이다.
이모작이나 삼모작이 가능한 지역에선 한 번쯤 농사를 망쳐도 곧 만회할 기회가 오지만, 우리는 때를 놓치면 일 년 농사를 고스란히 포기해야 하니 늘 조바심에 노심초사하는 것 아닐까 싶다. 벼농사든 밭농사든 과일 농사든 식물은 절대로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퇴비든 거름이든 비료든 미리미리 얹어줘야 정작 필요할 때 양분이 되는 것이고, 농약이든 제초제든 때맞춰 뿌려줘야 효과를 볼 수 있으니, 그저 빨리빨리 정신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도리가 없던 것 아닐까.
난센스 퀴즈 하나. 서울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정답은 ‘애인과 함께 간다’란다. 시간의 흐름이 참으로 주관적이요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르겠나만,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 꽃송이도 따주고 열매도 솎아줘야 하는 블루베리 농장의 5월은 ‘부지깽이라도 세워놓고 일 시키고 싶은’ 계절이다. 정말 시간이 화살같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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