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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

입력 2026-01-23 07:00

[전원일기] 장날의 매력은 최고의 가성비

(어도비 스톡)
(어도비 스톡)


서울 촌사람이 조치원에 ‘오일장이 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5로 끝나는 날, 그러니까 5일‧15일‧25일에 장이 서는 줄로만 알았다. 순대국밥으로 유명한 병천 아우내장이 1일과 6일에 서듯이, 경부선과 호남선과 충북선이 만나는 조치원 오일장은 4일과 9일에 선다고 나중에 동네분들이 가르쳐주셨다. 장날이 언제인지도 몰랐던 내가 이젠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걸 보니 어느새 조치원댁이 다 된 모양이다.

당산마을 블루베리 농장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박 씨 아주머니는 동네에서 남편 사랑으로 유명한 분인데, 여름과 겨울만 되면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한다. 여름 장엔 입 짧은 남편 보신할 거리가 풍성하게 나와서 좋고, 겨울 장엔 남편이 좋아하는 홍시와 곶감을 푸짐하게 구할 수 있어 최고라 하신다. “남편 뒷모습만 봐도 여직꺼지 가슴이 떨린다”는 아주머니를 동네 분들은 ‘남편 바보’라 놀린다.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귀촌 생활 초창기엔 번잡하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장 여기저기를 구경 다니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그땐 가수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의 노랫말 “구경 한번 와보세요. … 있을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를 실감하곤 했다.

돌이켜보니 농사지을 때 필요한 소품은 장날을 기다려 장만한 것이 많았다. 발목에 빨간색 러브마크가 예쁘게 장식된 양말도 장날 좌판에 진열된 것 중에서 골랐고, 밭일할 때 안성맞춤인 꽃무늬 몸빼 바지도 장날을 기다려서 샀다. 목덜미 가리개가 달린 차양 넓은 모자는 강한 볕을 견디지 못해 해마다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 장날이면 모양도 다양하고 빛깔도 곱고 무늬도 화려한 천 모자를 리어카 가득 싣고 오는 아줌마를 기다렸다가, 마음에 쏙 드는 걸로 골랐다. 어느 해인가 가을엔 긴 장대 끝에 주머니가 달려 있어 감이나 대추 딸 때 요긴하게 사용하는 도구를 득템하기도 했다.

장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노라면 손수 가꾼 파, 쪽파, 상추, 풋고추, 가지 등 채소를 작은 그릇에 담아 팔러 나온 할머니들 앞에서 절로 숙연해질 때가 많다. 언젠가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계란 3판 10000원’이라 쓴 작은 골판지를 세워놓고, 한 알이라도 깨질세라 30개들이 달걀판을 그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백발의 부부를 지켜보며 오래도록 서 있기도 했다. 달걀이 불티나게 팔리길 기도하면서.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가슴 떨리게 하는 장날의 매력

장날의 매력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가성비에 있는 것 같다. 조치원 주차타워 입구에 과일 좌판을 제법 크게 벌이는 50대 아줌마 아저씨. 당연히 부부인 줄 알았는데 펄쩍 뛰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인심 후한 아저씨가 덤을 얹어주면, 아주머니는 살짝 눈을 흘긴다.

철 따라 펼쳐놓는 과일이 달라지는데, 겨울의 주인공은 단감과 사과다. 1m는 족히 되는 커다란 비닐 봉투에 가득 담은 단감이 단돈 1만 원이다. 그보다 조금 작은 봉투에 담은 사과 또한 같은 값이다. 때론 한 봉지 사도 1만 원, 두 봉지 사도 1만 원에 가져가라 한다. 어차피 보관이 어렵기에 많이 파는 것이 장땡이라면서.

지난해 여름 참외철엔 거짓말 안 보태고 아기 머리통만 한 참외를 15개쯤 담아 1만 5000원씩 팔았다. 달달하고 아삭한 식감까지 1등급이라 해도 손색없는 참외가 오이보다 싸다니, 감격하면서 여름내 물리도록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상인들끼리 B급이라 부르는 과일이 시장에 왕창 풀리는 날 또한 장날이다. B급 과일은 하자가 있긴 하지만 집에서 식구끼리 먹기엔 상관없는 과일이란 뜻이란다. 조치원 명물인 복숭아철이면 B급 복숭아가 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는데, 운이 좋으면 한 상자에 정가 5만~6만 원짜리를 1만 원 정도에 건지기도 한다. 어차피 하루 묵으면 팔 수 없는 복숭아라며 한 보따리 그냥 가져가라는 행운이 따라오기도 한다.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사람 구경에 즐거움 배가 되는 장날

장날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이젠 장날마다 순회하는 단골 상인들이 하나둘 생겼다. 참외 파는 아줌마 아저씨만 해도 오랜 단골이다 보니 하루만 안 보여도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친정이 경기도 양평인데 오랜만에 친정 다니러 가느라 빠졌다”며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왔더니 기운이 펄펄 난다”는 아줌마를 보니 반가움 너머 마음 한구석이 찡해온다.

다음 코스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 묵밥 언니를 만난다. 한 그릇에 2000원 할 때부터 단골이었는데 지금은 3500원이 됐으니, 시장 물가도 만만치 않게 오른 셈이다. 묵밥은 오후 3시 전에는 가야지, 조금만 늦게 가면 높이 쌓여 있던 묵밥 그릇이 깨끗이 사라질 때가 빈번하다. 묵밥 맛을 더해주는 건 양념간장인데, 입맛 까다로운 블루베리 주인장이 엄지척할 만큼 언니가 직접 담근 간장에 양념 배합이 일품이다. 양념간장을 넉넉히 얻어와서 남은 것으로 가지도 볶아 먹고 호박도 볶아 먹곤 한다.

시장 중간 길 떡집 앞에는 깔끔한 할아버지가 벌여놓는 좌판이 있다. 여기선 주로 한 바구니 5000원짜리 고구마를 산다. 할아버지 밤고구마는 진짜 공주밤 부럽지 않을 만큼 포슬포슬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환상적이다. 거스름돈 내주실 때 돈도 차곡차곡 깨끗이 접어 관리하는 걸 보면, 입성만 깔끔하신 게 아니라 성격도 그러실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빠져나가면, 농약상이 즐비한 거리에 옥수수가루로 만든 꽈배기와 도넛을 파는 부부가 있다. 서울 말씨에 시골 시장에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모습의 아줌마 아저씨. 왠지 사연이 있을 듯한데, 아니나 다를까 알프스의 하이디 같은 아줌마가 “말도 말아요. 이이(남편)가 하던 사업이 망해서 이렇게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어요”라고 툭 털어놓는다. 밀가루보다 옥수수가루가 소화도 잘 되고 속을 편하게 해준다는 자랑에 귀가 솔깃해져, 요즘은 참새가 방앗간 지나칠 수 없듯 꼭 한 번씩 들르곤 한다. 5000원 내면 꽈배기 4개에 도넛 2개인데 늘 덤을 얹어주는 마음이 곱기만 하다.

말만 잘하면 덤도 후하게 주고 기분 좋으면 반값을 부르기도 하는 장날이면 나는 가능한 한 현금을 준비해 간다. 몇 푼 안 되는 것을 팔아도 신용카드를 긁으면 수수료가 붙는다니, 기왕이면 현금 내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다. 마침 소비 쿠폰이 나왔을 때는 “여기도 소비 쿠폰 되나요?” 물었더니, 장날에만 오는 상인들은 “조치원 지역민이 아닌 뜨내기라서 소비 쿠폰을 받을 수 없다”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통에, 물어본 내가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함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호떡 한 장에도 인심과 온기 가득

시장은 굳이 장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사람 냄새로 가득한데, 자천타천(自薦他薦) 조치원 전통시장의 명물인 찹쌀호떡집 부부를 지나칠 수 없다. 호떡집 바깥양반 최 씨 아저씨는 우리 농장의 반송 200여 그루를 연기 밭에서 전동 밭으로 옮길 때 처음 만났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붙임성이 남달랐던 최 씨는 반송을 캐서 뿌리를 천으로 싼 후 옮기는 내내 구수한 이야기를 쉼 없이 들려주었다.

“소나무 캘 때 삽을 어찌 대는지 보면 초짜인지 아닌지 대번에 알 수 있시유. 소나무는 이렇게 두어 번 옮겨주는 것이 좋쥬. 옮길 때마다 잔뿌리를 내려 흙냄새 맡을 중 알게 되면 2m 넘는 것(반송)들 옮겨 심어도 절대 죽지 않어유.”

최 씨는 농사일로 아주 바쁜 철 아니면 소나무 옮기는 일을 ‘알바’로 하러 다닌다고 했다. 본업은 따로 있어 벼농사도 웬만큼 짓고 있고 6611㎡(2000평)쯤 되는 복숭아 농장도 갖고 있다 했다. 한데 진짜는 따로 있다면서 “시장 안 찹쌀호떡집 몰라유? 거기 유명한 맛집인디. 우리 마누라가 하는겨.” 마누라가 찹쌀호떡집을 하는데 ‘엄청스리 얇고 바삭하게’ 호떡 부치는 솜씨가 좋다고 입소문이 나서 제법 손님이 많다고 자랑이 이어졌다. 호떡 부치느라 오른쪽 손목 인대가 늘어난 마누라를 위해 당신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직접 호떡 반죽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1년에 꼭 한 번씩 내외가 해외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가차운’ 동남아부터 시작해서 미국 서부도 가봤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단다. 유럽도 서유럽·동유럽 다 ‘댕겨왔고’, 중국도 만리장성·장가계·원가계 여기저기 유명하다는 곳은 거의 모두 가보았단다. 일본은 역시 온천 여행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행복 바이러스를 뿜뿜 뿜어대는 최 씨 특유의 공기청정기 같은 미소의 비결이 부부 동반 해외여행이려니 했는데, 실상은 더 아름다운 사연이 숨어 있었다. 최 씨 내외는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이 다가오면 하루이틀 짬을 내서 찹쌀호떡 봉사를 다닌다고 한다. 농장에서 쓰는 용달차에 호떡 굽는 데 필요한 난로와 불판을 싣고 마누라는 호떡 재료를 챙겨서, 조치원 인근의 경로당이나 요양원을 찾아가 그 자리에서 직접 호떡을 구워 어르신들에게 대접한다신다.

뜨끈뜨끈한 호떡을 받아 들고 활짝 웃는 어르신들 얼굴이 어른거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봉사활동을 다닌 지도 10년이 넘어간다고 했다. 처음엔 “선거 나오려고 그러는 거 아녀?” 오해도 받았고, “호떡 한 조각으로 생색내지 말어유” 핀잔도 받았지만, 지금은 진심과 정성이 통했는지 “최 씨네는 복 받을겨”, “자랑스런 시민상, 최 씨가 임자 아닌가유?” 덕담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시장 안 찹쌀호떡집 앞은 장날이면 제법 긴 줄이 늘어선다. 처음엔 1000원에 세 장 하던 찹쌀호떡이 요즘은 1000원에 두 장으로 값이 뛰긴 했다. 뜨끈뜨끈한 호떡 옆에 따끈한 국물의 어묵도 새 메뉴로 추가했다. 2년 전부터는 최 씨 아저씨가 호떡집 바로 옆에 붕어빵집을 열었는데, 없어서 못 팔 만큼 인기라며 허허허 웃으신다.

소소한 일상에 흔쾌히 만족하면서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며 행복해하는 우리네 이웃이 있는 곳.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한 곳이란 희망의 불씨를 키울 수 있음이야말로 장날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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