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세종시 당산마을의 겨울나기

예전엔 글을 읽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이란 표현이 나와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 풍경이 얼마나 쓸쓸하고 황량한지 알 것 같다. 블루베리 농장의 겨울이 그나마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블루베리잎이 예쁘게 물들기 때문인 듯하다. 가을비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내린 올해는 단풍 드는 시기가 조금 늦은 것 같다. 블루베리 단풍은 랑콤 화장품의 립스틱 색깔이 부럽지 않을 만큼 고운 색깔을 자랑한다. 조생종은 단풍도 빨리 들고 만생종은 천천히 색깔을 바꾸는 걸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가족 경사를 빛낸 블루베리주
5년 전인가, 블루베리는 열매 못지않게 이파리에도 풍부한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으니, 잎을 따서 차로 마셔도 좋을 거란 내용을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블루베리잎 차를 만들어보았다. 누군가는 잎을 쪄도 좋다고 했기에, 빨갛게 물든 이파리를 깨끗이 씻어 찜기에 찌고 볕 잘 드는 거실에서 말린 후 그 잎을 우려낸 차를 시음했다. 그때의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두어 번 마시니 흰색 머그잔이 연보라색으로 변색된 기억은 생생하다. 아무래도 커피를 애용했던 터라 블루베리차와는 금세 이별을 고했다.
대신 올겨울엔 2021년에 담근 블루베리주(酒)를 개봉하면서 뜻밖의 재미를 누렸다. 단골 중에 해마다 블루베리 10㎏을 주문해서 술을 담근다는 러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가 있다. 이 친구는 좋은 열매로 담가야 술맛 또한 좋다면서 가격이 얼마든 무조건 굵고 싱싱한 열매를 고집한다. 러시아에서 블루베리주는 위와 장 건강에 최고고 남자들 정력에도 아주 좋다고 알려져 있다며, 어눌한 한국말로 자랑이 늘어진다.
수확이 끝난 후 남은 과일로 과일청이나 과실주를 만드는 과정은 우연히 터득한 농사의 재미다. 그동안 팔지 못한 작고 못생긴 알을 모아 몇 차례 블루베리주를 담가보았다. 깨끗이 닦아서 물기를 제거한 블루베리를 설탕에 버무린 후 과실주용 담금주(25도 소주)를 붓고 뚜껑을 봉해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으로 작업 끝. 뚜껑에는 언제 담갔다고 적은 메모지를 테이프로 붙여놓았다.
올해는 블루베리 농장 주인의 맏손주 녀석이 무사히 군에서 제대했다. 그리고 마흔여섯에 노총각 딱지를 뗀 막내아들이 셋째 낳은 것을 기념해 아껴두었던 블루베리주를 개봉했다. 투명하고 맑은 빛깔에 블루베리 향이 살짝 도는 달달한 맛에 가족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웬만한 위스키 부럽지 않다면서.

시간이 익힌 선물의 가치
이곳 세종시 당산마을은 가족들 먹을 감나무 한두 그루쯤은 모두 심어놓았는데, 이파리를 떨군 채 주홍빛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풍경 또한 겨울 길목의 스산함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도 소나무 묘목을 심던 해에 감나무 묘목 5그루를 함께 심었다. 열매 따 먹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며, 감나무 묘목을 덤으로 준 묘목상 직원의 넉넉한 마음 덕을 본 셈이다. 겨울이면 유박비료 반 포대씩 얹어주고 가끔 하늘로 뻗은 도장지 잘라주고 나면, 일 년 내내 방치(?)해도 제법 많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다는 감나무가 신기하기만 하다. 일머리도 모르고 게으르기까지 해서 제때 약 한 번 쳐준 적 없는 우리 집 감이야말로 ‘완전 무농약’ 인증 대상임이 분명하다.
가지에 달린 채로 알맞게 익은 홍시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그 맛이 환상적이다.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져 터져버린 홍시를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며 맛나게 먹는 모습도 보았다. 수확한 감을 빈 종이 박스에 한줄 한줄 담아 바람 잘 통하고 서늘한 곳에 놓아두면, 말랑말랑 노글노글해지면서 홍시가 된다.
껍질이 투명해질 정도로 잘 익은 것들을 골라 가운데를 가른 후, 타닌 성분이 있어 변비를 유발하는 부분을 떼어내고 작은 스푼으로 떠먹는다. 농장 주인은 당뇨 판정을 받은 지 30년이 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홍시를 예닐곱 개씩 먹어도 이튿날 혈당 수치가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 사람마다 체질 차이가 클 테지만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달달한 맛이 일품인 홍시는 겨우내 최고의 간식거리다.
나머지 감으로는 감식초를 담근다. 감식초가 혈액순환에도 좋고 고혈압도 잡아주고 당뇨에도 그만이라며 권유하시는 동네 분들 말에 귀가 솔깃해져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종종 일을 벌이곤 한다. 감을 깨끗이 닦아 잘 말려서 커다란 통 속에 차곡차곡 넣은 후, 설탕도 조금 넣고 알코올 발효를 위해 막걸리를 한 병 붓는다. 통이 꽉 채워지면 밀봉해서 뚜껑 위에 날짜를 적고, 2~3년 기다렸다가 감식초 걸러내는 작업을 한다. 병뚜껑을 열고 두껍게 낀 곱을 걷어내고 나면 말간 감식초가 우러나온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초산 발효 냄새에 취해 넋이 나갈 때가 많다. 1.8ℓ들이 생수병에 담아 연말연시에 가족·친지에게 선물로 안겨줄 때면 ‘농부 되길 잘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감식초처럼 오랜 시간이 담긴 선물일수록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니는 것 같다. 15년 전인가 성바오로딸수도회 출판사가 ‘40대여, 숲으로 가자!’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6명의 필자를 모두 초대해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원고료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달라며, 수녀님들은 직접 텃밭에서 재배한 재료로 저녁상을 차려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예쁜 항아리를 선물받았는데, 그 항아리 속에는 수녀님들이 손수 담근 된장이 담겨 있었다. 된장 속에 정성스레 버무려 넣어둔 수녀님들 정성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시간이 담긴 선물의 가치를 일깨워준 수녀님들의 편안한 미소와 함께.

물 한 방울도 제때 뿌리고 거둬야
올해 블루베리밭의 월동 준비는 가을비가 제법 내려준 덕분에, 마음만 바쁘던 게으른 농부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특히 화분에 심은 블루베리는 물을 듬뿍 준 다음 꽁꽁 얼려야 무사히 겨울을 나는데, 올해는 그 작업을 생략해도 될 만큼 하늘에서 비가 풍성하게 내린 것이다.
물을 흠뻑 준 다음에는 블루베리를 위해 설치해놓은 점적관수(點滴灌水) 시설이 동파하지 않도록, 관 속에 머물러 있는 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빼내야 한다. 36개 골 중 12개 골에는 관수가 두 줄씩 설치되어 있기에 한 줄이라도 놓치면 이듬해 봄에 귀찮고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물탱크에 남아 있는 물도 모조리 빼야 하고, 지하수 끌어올리는 모터도 영하의 날씨에 터지지 않도록 두툼한 털옷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영하의 날씨가 지속될 때는 물을 살짝 틀어 졸졸 흐르게 해두기도 한다.
농사짓다 보면 뜻밖의 꼼꼼함과 치밀함이 요구된다는 걸 실감할 때가 많다. 농약을 칠 때든, 비료를 얹어줄 때든, 가지치기할 때든 한 나무라도 건너뛰지 않도록 세심히 챙겨야 한다. 제초제를 뿌릴 때도 덤벙덤벙 치고 나면 사나흘 후엔 금세 표시가 난다. 약 맞은 잡초는 누렇게 변색해가는데 건너뛴 곳엔 잡초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어설픈 농사꾼 아니랄까 봐 농기구를 잃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자주 저지른다. 방금 호미를 쓴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고, 작은 톱으로 지금 막 가지를 자른 것 같은데 그놈의 톱이 발이 달렸나 보이지 않는다. 농사철에 밭에서 잃어버린 연장들은 겨우내 어딘가에 숨어 있다 봄이 되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올봄엔 작년에 잃어버렸던 ‘메이드 인 재팬’ 톱을 엉뚱한 곳에서 우연히 찾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나마 농기구는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라 가격이 착해서(?) 다행이다.

호스 감는 법 하나에도 비결이
여름내 블루베리밭에 늘여놓은 호스를 걷는 작업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70m, 100m짜리 호스가 엉키기 시작하면 이웃 전 씨 할아버지 말씀처럼 뱀이 똬리를 튼 것 같은 모양이 된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는 호스가 풀리기는커녕 더 교묘하게 엉켜버리는 통에 머리끝까지 약이 오르기 일쑤다. 농사 시작한 지 처음 몇 해 동안은 호스를 제대로 관리 못 해 겨울엔 얼어 터지고 여름엔 햇볕에 갈라져 매번 새로운 것으로 장만해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호스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얼빠진 자신을 향한 자괴감이 더 컸다.
보다 못한 동네 어른들이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본체만체하더니만, 한분 두분 오셔서 ‘농사일 아무나 하는 것 아니라’며 타박하면서도 호스 다루는 법을 찬찬히 가르쳐주셨다. 열심히 배운 지금은 큰 실수 없이 100m 호스 안에 있는 물도 완전히 뺄 줄 알고, 한 발로 호스를 누르면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보기 좋게 말아서 보관하는 방법까지 익혔다. 농사일 어느 것 하나 만만하게 보거나 우습게 보면 큰코다치니, 하나부터 열까지 찬찬히 배우면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아, 올겨울엔 건너뛰어선 안 될 작업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지난봄 우리 밭의 블루베리 중 열매가 동전만 하게 열리는 챈들러와 달콤한 맛에 탱글한 식감이 일품인 에코타가 냉해를 입고 말았다. 해를 넘기기 전에 냉해 방지용 약을 미리 뿌려주었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소 잃고도 외양간 안 고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올해는 냉해 대비를 철저히 할 생각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 길고 긴 겨울을 버텨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조차 안 되지만, 마지막 잎까지 모조리 떨군 후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버텨내는 식물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식물학자의 글을 밑줄 치면서 읽은 적이 있다. 이후 블루베리의 겨울나기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세월이 어수선할수록 나 또한 혹독한 겨울을 나는 식물의 생존 전략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