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섬 같은 날이 있다. 잘 버티며 살다가도 무너질 것만 같은 날이 있다. 요즘, 내가 그랬다. 이런저런 어수선한 일들이 많았는데, 특히나 회사 일감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문제였다. 그간 게을렀나 싶어 일에 더 집중을 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혼자인 날이 늘어갔고 삼십대 힘들었던 기억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기어코 지난 연말에는 마음의 힘을 잃고 우울에 빠졌다. 이런 상황을 주위에 들킬까 싶어 더 분주한 척 보냈다. 감추다 보니 더 혼자였다. 그 우울한 공간으로 2002년 어느 날의 ‘끊어진 넥타이’가 떠올랐다. 책장을 뒤져 그날의 일기를 찾아 다시 읽어보았다.
와락 눈이 떠졌다. 가물가물해진 기억을 겨우 추스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방이었다. 조금씩 깨어나는 의식과는 다르게 몸은 쪼그라든 채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목에 감겨 있는 끊어진 넥타이. 순간 지금 상황이 정리되었다.
여기저기 멍처럼 시퍼렇게 퍼진 절망을 도무지 맨정신으로는 바라볼 수 없어 들이부은 소주 몇 병. 진한 알코올 냄새를 따라 목을 타고 들어오는 ‘죽음’의 유혹. 비틀거리며 넥타이 몇 개를 찾아 꼭꼭 묶었고, 문고리에 단단히 연결하고는 의자 위에 올라섰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니 끝인 줄 알았는데 넥타이가 끊어지면서 다시 삶이 시작되었다.
눈물이 났다. 죽지 못한 것이 슬펐고, 살아난 것이 애달팠다. 그 순간에도 몸은 강렬하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기라도 하듯 떨고 있었다.
-2002년 11월 17일 일기 중에서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 어느 신문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추천하는 글을 봤다. 그곳에 가면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이 답답함을 조금은 덜어내고 올 수 있지 않을까. 동아줄 같은 기대를 안고 찬바람에 마음까지 꾸부정해진 날, ‘사유의 방’을 찾았다.
‘사유의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먼저 만난 건 파도 소리, 혹은 바람 소리. ‘솨아아, 솨아아….’ 현실과 꿈의 경계 같은 통로를 또박또박 발소리조차 조심하며 천.천.히. 걸었다. 복 도는 완만했고, 어둠은 아늑했다. 그렇게 ‘사유의 방’에 들어섰다. 저 앞에 실눈 같은 조명을 받으며 반가사유상 두 점이 반가(半跏)의 자세로 사유(思惟)에 잠겨 있다. 그 모습이 깊고 정갈했다. 선뜻 마주하기에는 아직 서먹해 사유상과 조금 거리를 두고 한편에 자리 잡았다. 나와 사유상의 사이로 누군가는 머물고, 누군가는 스쳐갔다. 어떤 이는 웃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표정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사유상을 만나고 있었다. ‘툭’ 물음 하나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무슨 사연이 생겼습니까?”
가만히 사유상이 물어왔다.
그 질문에 마음은 뭐라 뭐라 하는데 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윽하게 감은 눈은 ‘이미 다 헤아리고 있으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순간 며칠 전 읽었던 하미나 작가의 ‘보석함을 열면 있는 것’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여름이 끝났음을 직감한 어느 날의 아침 나는 평소처럼 차를 마시다가 이번 여름을 보내며 수집했던 순간들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순간들, 기껏해야 1초에서 3초 정도로 이루어진 기억들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보석함을 열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산을 오르며 흐르는 기분 좋은 땀/ 아내와 여행지에서 맞이한 아침/ 매일 아침 처음으로 안부 묻는 친구의 메시지/ 출근한 사무실에서 클래식 음악과 함께하는 커피 한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리는 순간/ 짬짬이 책과 함께하는 시간/ 아버지와 요양원에서 잠시 만나는 데이트/ 혼자 떠난 여행에서의 홀가분한 마음.
‘툭, 툭’ 다시 사유상이 말을 건넸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저 혼자 칭얼대고 있었네요.”
‘대학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내 주제에 무슨 공부일까 싶었는데, 사람들을 만나며 다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할 수 있을까 겁도 나지만, 지금 나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제 목욕탕을 가서 체중을 재보니 68kg. 8년을 쉬지 않고 일만 했는데도 온몸에 절망만 배어 있다. 다시 희망을 부여잡고 싶다. 살고 싶다.’
-2009년 4월 10일 일기 중에서
희망이라는 말조차 잊어갈 즈음, 아내가 대학원에 무작정 입학을 시켜버렸다. 그날 내 주제에 무슨 공부냐고 크게 싸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보험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원에 가서 고객을 만드는 방법도 있겠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마음을 바꿔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기회의 신’이 있단다. 앞에 머리는 길고 뒷머리는 민머리.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는…. 대학원에서 나는 ‘기회의 신’을 만났다. 그곳에서 ‘경영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간절한 마음으로 석사를 마치고 전문 자격을 취득하고, 박사과정까지. 그렇게 나는 다시 꿈을 꿨고, 2011년부터 컨설턴트로, 강사로 쉼 없이 달려왔다.
삼십대의 시간은 나에게 트라우마다. 조금만 일이 풀리지 않아도 덜컥 겁이 나는 건 그 시절의 불안함 때문이리라.
꽉 찬 생각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으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비운다는 건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 지금 나에게는 꽉 들어차 옴짝달싹 못 하 게 하는 과거의 상념들을 덜어낼 여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나도, 내 그림자도 나만의 섬에서 걸어 나올 작은 힘이 생겼다. 생각에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곁의 사 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불안했던 시절의 기억을 따라가다가 완주 아원고택이 떠올랐다. 오성마을 입구에서 마을 위쪽에 있는 아원고택까지 가는 길은 기웃거리기 좋은 길이다. 하늘로 쭉쭉 뻗은 기와집들은 햇볕 잘 드는 마당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마당에는 구수한 메주가 누렇게 떠 있었고, 하얗게 분이 오른 곶감이 줄줄이 잘 익은 바람을 쐬고 있었다.
담쟁이 이파리를 살짝 걷어내며 들어선 입구. 어둠과 빛을 잘 섞어놓은 좁은 통로는 이곳이 무념무상의 공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을 세며 열 걸음쯤 걸었 을까, “똑, 똑…” 동그란 물방울 소리로 가득 찬 네모난 공간이 나타났다. 물방울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이 공간도 동그랗게 변화시킬 것만 같았다. “똑, 똑…” 물방울의 울림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불교 경전 ‘숫타니파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채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빛과 어둠은 동무처럼 어울렸고, 바닥에 백자 몇 점도 군더더기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는 사유조차 사치일 것만 같았다.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정지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똑, 똑…” 물방울 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했다. 이내 귀를 타고 들어와 차갑게 목을 축이더니 가슴으로, 마음으로, 아래로, 아래로…. 한 방울, 두 방울…. 이제 마음은 물방울이 되어 네모난 공간을 흐르고 있다.
“똑, 똑….”
‘어? 물방울 소리가 눈물을 닮았네. 가만있자. 언제 적 눈물일까?’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얘기 작은 이얘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오는 소리….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끼어 드는 소리
-서정주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중에서
서른둘,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은 불과 일 년 만에 엄청난 빚만 남겼다. 빚을 갚기 위해 버둥댈수록 수렁처럼 빚만 늘어났다. 빚을 갚기 위해 몸부림쳤던 8년간의 시간은 온통 흑백이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렸고 우유를 돌렸다. 낮에는 보험 영업과 건어물을 판매하러 다녔고, 저녁에서 밤까지는 대리운전을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 이외에는 아 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 꿈을 꾸던 날들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 시간 어디쯤에서 봤던 ‘청춘’이라는 영화. 주인공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괜. 찬.타. 괜.찬.타.’ 절규하듯 외치던 장면에서 서러웠던 현실이 한꺼번에 울음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후 위로가 필요한 날에는 어김없이 이 시를 주문처럼 웅얼거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은행과 사채에서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는 전화. 신문을 돌리고 영업과 대리기사를 뛰면서도 그 많은 빚들을 갚을 수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매일매일의 고통과 노동이 쌓이면서 겨우 이자만 갚던 시간이 지나고 원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끝 어디에서 대학원을 만났고, 기회와 조우했던 것이다.
어느 날 예전의 나처럼 힘든 상황에 내몰린 분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생겼다. 강의 중에 내 얘기를 하게 되었고,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시를 읊었다. 순간, “똑, 똑…” 강의실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눈물. 그 눈물을 따라 나도 왈칵 눈물을 쏟았던 날. 아, 맞다. 아원 고택 사유의 공간을 채우는 물방울 소리는 바로 그날의 눈물을 닮았다. 둥근 물방울은 삼십대 시절 매일 꿈꾸던 바람이었고, 네모난 공간은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나였다. 둥근 물방울이 네모난 공간을 채우며 흐르듯 아직 남아 있는 나의 트라우마의 시간을 위로하며 흐르기를 오래오래 기도했다.
싱잉볼. 7가지 금속이 섞여 길고 깊은 울림이 있어서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는 데 쓰이는 종이다. 엄마 손을 잡고 성당을 다녔던 나는 미사 중에 울리던 싱잉볼 소리가 좋았다. 그 소리를 다시 만난 건 코로나가 막 확산되던 때다. 코로나로 강의가 취소되기 일쑤였고, 또다시 무너질까 걱정이 많았던 시간이다. 우울한 마음에 여행을 다니다가 알게 된 ‘뮤지엄 산’. 하늘과 나무와 바람이 잔잔하게 반영되는 물의 길을 따라 당당한 모습의 건축물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을 토닥이는 고요한 명상관을 만났다.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 하는 공간은 의외로 아늑했고, 가만히 관조하고 있는 눈빛 같았다. 힘든 청춘의 시간을 보낸 후, 늘 조마조마하며 길을 걷는 마음을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바 닥에 누웠다. 천장을 반 바퀴 가로지르는 실 같은 빛이 가슴에 닿자, 엄마가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은 엄마의 품을 많이 닮았구나.’ 엄마는 종일 남의 이불을 꿰매셨다. 쉬 지 않고 이불을 꿰매도 털어지지 않았던 가난처럼, 저녁이면 온통 실 부스러기가 엄마 옷에 달라붙어 있었다. 혼자 놀다가 옷을 털어드린다는 핑계로 엄마 품에 안기는 저녁 무렵은 어린 나의 하루 중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다.
“댕….”
싱잉볼이 한 번 울렸다. 뭉클한 숨이 올라왔다. 일상이 무거웠고 엄마가 그리웠다. 다시 “댕….”
두 번째 울림에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댕….”
세 번째 싱잉볼 소리에는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 공기만큼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기억 하나가 들어왔다.
대학원을 마치고, 2012년 경영 컨설팅과 교육을 하는 사업체를 창업했다. 사업체 이름은 ‘안김.’
삼십대를 보내고 있던 어느 여름, 밤새 비가 내렸고 여느 날처럼 빗속에서 신문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맡은 구역은 공단 지역. 비에 고인 물에 오토바이가 빠지며 넘어졌고, 가지고 갔던 신문이 도로에 나뒹굴었다. 주섬주섬 비에 젖은 신문들을 줍다가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희망이 없다는 건 끝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것과 같았다. 막막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젖은 신문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나를, 어느 공장의 경비분이 우산도 없이 다가와 아무 말도 않고 안아준 것이다. 누군가에게 안긴다는 것.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그때 알게 됐다.
그렇게 창업한 ‘안김’은 조금이라도 힘든 사람, 기업에 힘이 되겠다는 각오로 지은 이름이다.
네 번째 싱잉볼 소리를 들었을까. 어느새 의식은 가물가물 잠이 들었다. “자, 모두 그만 일어나세요.”
명상관 강사의 말에 구름 같던 의식이 다시 몸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다른 은근한 향기가 났다.
사는 게 간단치 않다. 생각해보면 서른둘에 알게 된 절망 또는 두려움도 과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 과정을 무사히 버티고 지나왔다. 타박타박 그 터널을 기어코 걸어 나왔 기에 지금의 나의 삶을 만나고 있는 것이리라. ‘힘들었으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힘들었기에 쉽게 휘청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에 감사한다. 올해는 경기가 안 좋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그 여파에 나도, ‘안김’도 흔들리는 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나의 회색빛 삼십대 덕분에, 가족의 든든한 응원 덕분에, 그리고 미래라는 꿈을 꿀 수 있는 덕분에.
마흔이 넘어 나의 주제곡이 생겼다. 나는 오늘도 나의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브라보마이라이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