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

돌아보며 걷는 미래

기사입력 2025-06-28 08: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올림픽이 끝나고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여행사들은 인재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해외여행이라는 당근에 이끌려 여행사로 들어갔다. 여타 기업에 비해 급여는 적었지만, 해외여행은 매력적이었다. 잦은 해외 출장은 일과 여행의 경계가 모호했다. 고객들을 인솔하는 일이지만 보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이 여행객과 다름없었다. 제주도도 못 가봤는데 국제선을 타고 해외를 다닌다는 게 신기했다. 세계 곳곳으로의 출장은 나의 인문학적 소양을 몰라보게 높여주었다. 방문국의 역사와 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들과 산업에 관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여행사를 운영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무난하던 여행사 생활은 외환위기(IMF)를 맞아 흔들렸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 네 살 아들과 임신한 아내를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손수레에 만물상을 꾸려 오일장을 찾아다니는 지인이 있었다. 한번 해보겠냐고 물었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따라갔다. 시장에 도착하는 순간 각오는 사라지고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노심초사했다. 손수레 옆에 있지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서 손님이 오면 달려갔다.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다음은 실내장식 사업을 하던 친구와 함께 일했다. 가게를 철거하고, 폐기물을 소각장으로 실어 나르고, 석고보드를 지고 계단을 오르는가 하면,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만삭이던 아내 또한 그냥 있지 않았다. 인쇄물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공공 디지털화 작업을 했다. 하루 종일 자판을 두들겨 손마디가 아프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 아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소위 눈물 젖은 빵을 먹던 기간이다. 어떤 어려움도 이때와 비교할 수는 없다. 몸과 마음은 힘들었지만, 여행의 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외환위기가 끝나고 여행사로 돌아왔다. 내 사업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준비했다. 회사 이름을 정하고 사무실을 알아보고, 전화를 신청하고 로고(Logo) 제작을 의뢰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사업자등록증을 보며 새로운 다짐을 했다. 나이 사십이었다. 때맞춰 행운도 따랐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가 모 신문사 편집장으로 가면서 해외연수 사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신문사를 등에 업고 영업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면에 공고가 나기 무섭게 모집되었다. 몇 년 동안 순항하던 회사는 편집장 친구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어려움이 왔다. 경쟁 업체의 시기 질투로 독점으로 진행하던 행사를 일일이 입찰을 통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절차는 까다로워지고 수익은 떨어졌다. 결국 신문사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연수 사업에 집중했다. 공무원, 교사, 공기업, 기업체 등 연수를 하는 곳은 무조건 찾아가서 영업했고 경쟁입찰에 참여했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코로나(COVID-19)는 많은 것을 멈춰 세웠다. 여행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출발 예정이던 단체는 줄줄이 취소되었다. 전화벨은 멈췄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출근해도 할 게 없으니 무료한 시간이 지속되었다. 급여 일부는 정부에서 지원해주었지만,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명 두명 회사를 떠났고, 나 또한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학생이던 아이들의 등록금도 대야 하고 생활비도 필요했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자전거를 이용해 배달을 시작했다. 부족한 돈은 적금과 보험을 해약하며 버텼다. 시간이 지나도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절박함이 들었다. 쉰여덟, IMF 이후 두 번째 어려움이 찾아왔다.

덮밥 프랜차이즈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지인을 찾아갔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한숨짓던 내게 해보라고 권유했던 사람이다. 그때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코로나가 이토록 오래갈 줄은 몰랐다. 식당들도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곳은 상황이 달랐다. 배달에 적합한 메뉴라 오히려 호황이었다. 식당을 방문한 늦은 시간에도 주문은 계속되고 배달원들이 오고 갔다. 투자비와 매출 대비 수익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본사 담당자를 만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여행업에 있던 내가 음식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식당 차릴 비용도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좌고우면할 여지가 없다. 다음 날 본사를 방문해 사장을 만나고 개업할 장소를 찾아다녔다. 주요 상권에는 벌써 누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좀 더 일찍 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여러 지역을 찾아본 후 신길동에 자리를 잡았다. 열 평 남짓한 공간에 보증금 3000만 원, 월세 180만 원으로 계약했다.

오전 9시 가게에 도착한다. 쌀을 씻어 밥솥에 얹고, 달걀을 수비드 방식으로 익힌다. 소스를 데우고 토핑 재료를 손질하는 등 분주한 아침을 보낸다.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주문이 집중되어 숨 돌릴 틈이 없다. 메뉴가 바뀌지 않게, 토핑이 빠지지 않게, 주문 순서대로 차질 없이 포장해야 한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실수하기 일쑤다.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들도 응대해야 한다. 브레이크타임이 시작되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부족한 재료들을 보충하고 저녁 판매를 준비한다. 매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게 이용 후기다. 메뉴가 바뀌어서, 배달이 늦어서, 음식 모양이 흐트러져서 등 많은 이유로 후기가 안 좋을 수 있다. 올라온 글들에 성실히 답변한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또 한 번의 주문 폭풍을 맞고 가게를 마감하고 나면 저녁 10시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술 한잔한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왜 술을 많이 마시는지 이해할 수 있다. 몇 시간 후면 변함없는 일상이 또 기다리고 있다.

3년이 지났다. 아들과 딸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코로나는 약화되었다. 배달 매출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쳇바퀴 도는 일상은 점점 싫어졌다. 아직 수익이 발생하는 매장이었지만 부동산에 내놓았다. 여행업은 회복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여행업으로의 복귀는 망설여졌다. 여행업 환경은 코로나 이전과는 달랐다. 단체로 가던 연수가 소규모 개별화되었고, 경기 침체와 인식 전환으로 연수 자체가 없어진 곳도 많았다. 직원 충원 또한 문제였다. 코로나로 그만둔 직원들은 그동안 다른 직종에 안착해서 복귀가 쉽지 않았다. 나 또한 육십이 넘었다. 예전처럼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많다. 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육십갑자를 돌아 회갑을 맞았다. 요즘 시대 환갑은 청춘이라 하지만 나이 계급장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풍부한 경험을 내세워도 취업 시장에서 대우받지 못한다. 놀면서 살 수 있는 팔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월급에 목매며 늙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순위를 정하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르겠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나 자신을 위해 쓰고 싶었다. 여행과 더불어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글쓰기는 마음속으로 갈구하면서도 망설이기만 했었다. 더 미루다가는 영영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필집 한 권 단독으로 내는 것과, 해외를 다니면서 보고 느낀 점을 영상으로 남겨야겠다는것을 목표로 삼았다. ‘글쓰기와 여행 유튜버’ 두 가지를 최우선 순위에 올렸다.

일자리를 구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의전용 차를 운전하기로 했다. 주로 외국인들을 태우고 다닌다. 처음 맡은 일은 전용기를 이용해 한국을 방문한 태국인 가족을 운전해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고 데려왔다. 동대문, 명동, 성수동, 에버랜드 등 여러 곳으로 다녔다. 며칠 동안 운전해주다 보면 자연스레 친해지기도 한다. 빈말일지라도 자기 나라 오게 되면 연락하라는 말도 한다. 실제로 동료 한 명은 브루나이 왕족의 초청으로 한 달간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 미국, 프랑스, 중국 등 각국 사람들을 운전해주면서 또 다른 세계를 보는 듯하다. 의전용 차량이라 손님들 수준이 높았고, 단순한 일이라 스트레스가 적었다. 돈 벌면서 내가 원하는 때에 시간을 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운전을 잠시 쉬고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산맥에 걸친 세 나라를 둘러본다. 북경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사막을 건너고 설산을 넘어 다섯 시간 만에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도착했다. 마음이 편했다. 여행사에서는 항상 단체를 인솔해서 해외를 갔다. 손님들에게 신경 쓰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보고 싶은 곳을 볼 수 있다. 어디서나 잘 수 있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한 손에 카메라, 다른 손은 지도를 들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과 실크로드의 흔적들, 프로메테우스와 이아손의 이야기 등 다양한 문화와 유적이 있었고, 신화와 전설이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했고, 다양한 민족들이 산과 바닷가 계곡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포도주를 만든 지역답게 저렴하고 품질 좋은 포도주가 넘쳐나는 등 코카서스 국가들은 매력적이었다.

몇 개월 후 다시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히말라야로 간다. 설산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네팔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인력거가 골목길을 활보했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인 거리는 혼란스러웠다. 먼지와 매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너무나 당연한 듯 사람들 얼굴은 밝았다. 화려한 색상의 천으로 만든 옷으로 몸을 감싼 여성들과 달리 남자들 차림은 제각기 자유로웠다. 국내선을 이용해 등반 베이스캠프라고 불리는 도시 포카라로 갔다. 그곳에서 히말라야로 이동해 등반을 시작했다. 하늘에 닿을 듯한 설산들이 거인처럼 우뚝 서 있고, 어깨너머로 얼굴을 내민 일출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 덮인 봉우리를 오렌지빛으로 칠하고 있었다. 장엄했다. 자연의 위대한 작품 앞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히말라야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얼굴에는 미소뿐이다. 음식과 잠자리는 열악하고 고산증으로 잠 못 이뤄 밤새 뒤척인 적도 있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히말라야를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온 사람은 없다.” 삶이 지쳐갈 때쯤 다시 찾을 것이다.

유튜브 채널명 ‘하늘물고기’, ‘시니어 자유여행’, ‘삶을 기록하는 여행’, 내 유튜브 제목이다. 일하며 여행을 떠나고, 영상을 찍고 글을 쓰려고 한다. 글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 것이고, 켜켜이 쌓인 영상일기는 오늘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다. 나이테는 늘어가고 기억력은 흐려지지만, 꿈꾸는 나는 아직 청춘이다.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신발 끈을 조인다.

#은퇴 #공모작 #시니어 #글쓰기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관련기사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댓글

0 / 300

브라보 인기기사

  • 이희주, 넥타이 풀고 시인으로 돌아오다
  • “마음속 소년·소녀 찾기” 시니어 시 쓰기, 어렵지 않다
  • 시, 나도 쓸 수 있다, 함께면 더 즐겁다
  • [시조와 여행] 권근이 바라본 탐라의 모습

브라보 추천기사

브라보 테마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