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시한부라니

살면서 나의 노력이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건강이었다.
2021년 10월 30일.
내가 살아온 인생 중 그 어떤 날보다 잊을 수 없는 날….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여름.
7월 6일 1차 코로나 예방접종을 했고, 3주 뒤인 7월 27일 2차 코로나 예방접종을 했다.
그러고는 1~2주 후부터 나의 왼쪽 윗눈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성형외과를 방문해 상안검 수술을 했다.
그 후 서서히 수술받은 왼쪽 눈이 감기고, 사시가 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안과를 가서 여러 검사를 진행했는데, 본래 사시가 없던 사람이더라도 사시가 올 수 있다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그러나 사시만 온 것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얼굴의 왼쪽 부위가 마취한 것처럼 감각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정말 얼굴을 딱 반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얼굴의 반쪽만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입술, 잇몸, 혀까지 왼쪽 얼굴 모두 감각을 잃어갔다.
여러 군데를 알아보다가 2021년 9월 24일 신경과를 추천받아 진료를 받았는데, ‘중증근무력증’이란 진단을 받아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스테로이드 복용 후 일주일 정도는 살짝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증상이 똑같아졌고, 걱정되는 마음에 의사에게 CT나 MRI 검사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여러 번 드렸다.
신경과 의사는 검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나의 의견을 무시한 채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왼쪽 눈을 전혀 뜨지 못하니, 결국 2021년 10월 30일 소견서를 써주며 CT를 찍어보라고 했다.
토요일이었던 그날 시계를 보니 12시 10분쯤. 근처에 아는 영상의학과가 있어 바로 달려가서 CT를 찍었다.
그런데 CT를 찍고 나온 내게 바로 MRI를 찍어보자는 말이 돌아왔다. ‘아… 뭔가 있구나.’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바로 MRI 검사를 했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곳에 계시는, 나의 오랜 지인이신 의사 선생님께서 나의 양손을 잡고 울먹이시며 남편에게 연락을 하란다. 그 순간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나는 바로 휴대폰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앞에서 울먹이던 그 의사 선생님께서 남편에게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난 후 나는 지인이신 의사 선생님과 함께 영상의학과의 부원장을 마주했는데, 그는 내게 단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앞으로 3개월도 채 못 살 테니 가서 죽을 준비를 해라”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의사의 말과 행동. 의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건들거리며 환자에게 죽을 준비를 하러 가라고 말했다.
세상에 이런 몰상식하고, 어처구니없고, 비인간적인 의사가 있을 수 있을까?
울먹이던 내 지인 의사 선생님도 그 부원장이란 사람에게 어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순간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때, 그 잠시 잠깐의 순간… 지금껏 살아온 50여 년의 내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떠올랐던 생각.
첫 번째… 후회될 일도, 그다지 억울할 일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웬만큼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고 살았던 삶이었더라.
여자지만, 여자 혼자서 미국 그랜드캐니언도 가보고 라스베이거스 여행까지 해보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후회 없이 산 듯해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다.
두 번째… 나의 어여쁜 쌍둥이들. 그 쌍둥이 남매가 수능을 20일 남짓 남겨두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이 세상을 작별할 즈음 나의 쌍둥이들은 20세 성인이 될 테니.
그래도 나의 소중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것을 본 후에 죽을 테니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1남 2녀 중 막내인 나에게 이미 이십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말고, 지금 홀로 계신 나의 엄마. 내가 그 엄마를 앞서 하늘나라로 가는구나 생각하니 엄마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네 번째… 쌍둥이들과 함께 그때까지 살고 있던 26평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남매인 우리 쌍둥이들에게 각자의 방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그래서 나는 혼자서 남편도 모르는 조합원 아파트 하나를 사서 입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입주를 2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나는 그 새집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서 세상과, 그리고 쌍둥이들과 이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좀 억울했다.
그렇게 3개월 시한부 통보를 받은 그 짧은 시간에 난 이 네 가지 생각을 하며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는데… 영상의학과 부원장이라는 그 의사가 그사이 나의 MRI를 대구 경북대학병원에 판독 의뢰했던 모양이었다.
“아, 판독 의뢰해보니 바로 죽지는 않는답니다. 아무튼 병원에 가보세요.”
그러고는 사라졌다. 이게 대한민국 의료의 현실인 것이다.
물론 모든 의사가 그렇지는 않지만, 과연 저런 사람이 의사의 자격이 있는가 되묻고 싶다. 그러나 같은 의사라도 내 곁에서 함께 울어주신 지인 의사 선생님 같은 분이 있기에, 우리 같은 환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인 의사 선생님께서 경북대병원의 한 뇌종양 교수님을 추천해주셨다. 나는 지인 선생님께 신뢰가 두터웠던 터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경대병원에 예약했다.
그렇게 나의 뇌종양 투병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언니는 계속해서 서울에 가서 치료를 받자고 말했지만, 3일 뒤 나는 경북대학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그렇게 11월 29일, 나는 8시간의 긴 뇌수술을 받았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열몇 시간을 있다가 일반 병실로 갔다. 당시 나는 24시간 간병인을 섭외해둔 상태였다. 중환자실에서 내려온 나는 제일 먼저 소변줄을 빼고 싶었고, 고맙게도 간호사가 바로 소변줄을 제거해주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었고, 간병인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간병인은 내게 안 된다며 누워서 소변을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며 혼자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간병인이 나를 부축해 화장실에 데려다주었고, 소변을 본 후 화장실 문을 열고 혼자서 침대로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는 내 머리와 몸에 그렇게 많은 링거와 피 빼는 줄을 달고 있는 중환자인 줄 몰랐던 거다.
바로 산소호흡기를 달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인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실이 없어 7인실에 입원한 상태였는데, 내가 병실로 돌아온 다음 날, 내 앞 침대 할머니 환자 간병인이 코로나에 감염이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입원한 병동은 격리 병동이 되었다. 간병인 외의 가족 한 명은 올 수 있었던 면회조차도 차단되었고, 그렇게 나는 수술 2일 차부터 격리 병동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방독면을 끼고 회진을 돌던 시기. 검사를 위해 옮길 때 환자를 관 같은 곳에 눕혀 옮기던 시기.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후 퇴원시킬 사람은 환자도 간병인도 모두 미리 퇴원시키고, 나의 병실에 맞은편 침대의 팔십몇 살이 되신 할머니 환자와 60대 간병인, 내 옆옆 침대의 70대 할머니 환자와 간병인, 그리고 나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나의 간병인. 이렇게 나의 코로나 격리 병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내 옆 할머니 간병인이 환자를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다. 나쁜 사람… 걷는 것조차도 못 하는 격리 병동 환자를 버려두고 도망가는 사람이 간병인 자격이 있을까?
그리고 수술 후 셋째 날이 되었고, 나는 말을 못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왜 내가 그때 말을 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의 생각은 제대로 있는데, 입 밖으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면회도 차단된 내가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밖에서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렇게도 많이 울었다고….
말을 못 하게 된 사흘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날부터 나는 서서히 다시 말문이 트였다. 그런데… 난 분명히 똑바로 걸어서 입원을 했는데, 수술 후의 나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어기적어기적 반 장애인이 된 나는 수술 후 입원 16일이 지난 후에야 퇴원을 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있는 나의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수술 후 조직 검사를 통해 알게 된 나의 병명은 ‘역형성 혈관주위세포종 3등급’. 보통의 다른 뇌종양은 4등급까지 있는데, 내 병명은 3등급까지만 있다고 한다.
악성 뇌종양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30회의 방사선 치료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언니의 부축을 받아 엉금엉금 걸어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뇌수술을 받느라 밀어버린 한쪽 민머리와 함께 나의 길고 긴 투병이 또 시작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받을수록 머리카락은 매일 한 줌씩 빠지기 시작했다. 원래 잘 걷지 못했는데, 나의 걸음은 이제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환자 중의 환자가 되어버렸다.
방사선 치료 30회가 끝나고, 맥없이 집에서 몇 달을 잘 움직이지도, 잘 걷지도 못하는 삶.
더는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는데 봄이 왔고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도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쌍둥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하루 백 걸음… 천 걸음… 2천 걸음… 이렇게 매일 서서히 걸으며 나의 걸음은 점점 정상인에 가까운 걸음이 되었다.
뇌수술 후 중심축이 무너져 뛰는 것도 힘들고, 혹시라도 급하게 뛰다 보면 몸이 수술한 왼쪽으로 치우쳐지기 때문에 지금도 조심해야 한다.
또 수술 후 냄새에 너무 민감해져 냄새 때문에 못 먹는 음식들이 너무 많아졌다. 식사량도 수술 전보다 반은 줄었다. 원래도 소식을 하던 터인데, 소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못 먹는다.
그래도 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왼쪽으로 왔던 안면 마비와 사시, 복시 또한 수술 후에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주변에 뇌수술을 하신 분들 대부분이 심한 두통으로 힘들어하시는데, 난 두통도 없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뇌종양이 오기 전 나는 개인 스파를 운영하고 있었다. 뇌종양 수술 후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된 나의 가게, 잃어버린 나의 삶.
하지만 너무나 고맙게도 나는 다시 일어섰고, 걸었고, 조금씩 정상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인연의 고객들이 나를 애타게 찾아주었고, 나는 또 다행히 직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스파 원장이 되었다.
2023년 5월, 나는 대형 스파 원장으로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찾아온 병.
9월 건강검진을 받다가 발견된 자궁 쪽 이상 세포로 나는 뇌수술 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수술대 위에 올라 3시간 30분 동안 난소와 자궁 적출술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나는 산정 특례 2관왕이 되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8시간 뇌수술도 했는데, 몇 시간 정도의 자궁과 난소 수술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또 버텨냈다.
나는 이미 2021년, 내 삶이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뇌수술 후 사는 내 삶은 덤으로 다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볼 수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고, 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그래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기에 감사하다.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또 새 하루 새 아침을 맞이한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나는 버려야 할 인연과 계속 이어가야 할 인연을 구분하게 되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내가 나약해지니 등 돌리는 사람이 있었고, 반면 나의 힘겨움 속에 정말 이 사람이 나에게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인간관계가 가려지더라. 이제는 내 삶의 인연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전국 뇌종양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다. 뇌종양에 대한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슬픈 일은 그 인연들이 어느새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났다는 거…. 만남과 이별을 겪으며 나는 또 내려놓는 삶을 배우고 있다.
뇌수술 당시 내가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남편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수술실 앞에서 두 손 모아 수술실 앞을 지켰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미성년자였던 나의 쌍둥이들이 이젠 내게 보호자처럼 밥을 챙겨주고, 나의 여러 가지 일상을 도와주고 있다.
2024년 11월 29일, 뇌종양 수술 3년 차.
새로운 인생을 사는 엄마의 나이는 이제 세 살이 되었다며 다시 태어난 제2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이제 난 곧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군복무를 마치고 올 아들을 위한 만남을 기다리며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겠지.
그렇게 나의 소중한 하루가 지나가고 소중한 하루가 또 온다.
그 하루가 나는 행복하다.
나는 나의 남은 삶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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