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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기사입력 2025-06-17 10:16

[명소 답사기] 천천히, 조금은 여유롭게 마음을 어루만지며

마음이 어수선할 땐 걷는다.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고들 하는데 이 또한 건강한 마음을 위한 걷기가 된다. 강원도 영월에 다녀왔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청량한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길 따라 걷고 무수한 계단을 숨차게 걸어 올라갔다. 강물이 불어나면 자손들이 건너지 못할까 나무를 엮어 만들었던 섶다리를 건넜다. 한참 전의 영화 이야기가 담긴 곳에선 마음의 힐링을 얻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형성된, 그 옛날 어린 임금이 머물던 유배지의 초여름 풍경은 아련했다. 31번 국도를 따라 초여름의 영월을 만났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하늘과 맞닿은 초록 세상 속으로, 상동 이끼계곡

빌딩 숲을 완전히 벗어났다.  온통 초록 세상이다. 영월의 상동 이끼계곡은 지친 심신의 기운을 단숨에 맑게 해주는 숲이다. 막 싹이 돋아 연두에서 초록으로 이어지는 숲속의 색감은 싱그러움 그 자체다.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깊은 산골짜기에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지만, 트레킹하기 좋도록 비교적 길이 잘 다듬어져 있다. 산들거리는 숲속의 바람은 기분 좋고 계곡 물소리는 시원하다. 수량이 불어나는 장마 즈음이면 세찬 물소리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씻겨나간다. 순간 바쁘고 머리 아프던 세상의 모든 생각에서 말끔히 벗어난다. 이런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잡다한 일상이 잊힌다. 워라밸이 별건가 싶다.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숲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숲을 투명한 연둣빛으로 빛나게 한다. 

좁다란 산길을 걷다 보면 앞을 가리는 거미줄과 나무줄기, 쓰러져 뒤엉킨 나무가 맞이한다. 얼핏 여기가 열대우림인지 쥐라기 공원인지 비약된 상상력이 마구 발동한다. 계곡의 바위를 온통 뒤덮은 이끼도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이끼는 생육조건이 까다롭다는데 바위나 돌멩이, 쓰러진 나무에도 이끼가 자라고 또 다른 식물들이 공생 중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자연의 엄청난 생명력을 상동 이끼계곡에서 만났다. 신비로운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단종의 청령포와 장릉

청령포는 여전히 동서남북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처럼 갇혀 있다. 한쪽으로는 험준한 암벽으로 가로막혀서 옴짝달싹하기조차 어려웠을 만큼 적막하다. 오백몇 년 전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된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이야기를 직접 눈앞에서 돌아본다. 어찌 이리도 두절된 공간을 유배지로 찾아냈는지 신기할 정도다. 

세종의 장손으로 태어난 단종은 열두 살 나이로 조선 제6대 임금에 즉위했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 찬탈을 당했고, 성삼문·박팽년 등의 상왕 복위 움직임이 누설돼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었고, 17세 되던 해 영월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세월을 살았다. 청령포 나루터에 서면 단종의 유배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의 비통한 시조가 절로 떠오른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청령포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3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배에서 내려 몇 걸음 지나 곧바로 나타나는 단종 어소에는 어소 행랑채, 궁녀와 관로 거처가 함께 있다. 어소 옆으로 당시 단종의 처절한 생활을 보고 들었다는 전설이 깃든 관음송(觀音松)이 거대하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담장 밖에서 거의 절반이 구부러진 채로 단종 어소를 향해 굽어져 자라고 있는 소나무다. 마치 임금에게 고개 숙인 신하 모습 같다. 밤마다 이곳을 찾아와 문안을 드린 충신 엄홍도 소나무라고 부른다. 암벽 산 계단을 오르면 한양을 향해 단종이 그리움과 시름에 잠겨 서성였다는 노산대에서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인다. 단종의 순애보가 깃들었을 망향탑에선 정순왕후를 향한 단종의 그리움이 느껴져 마음이 먹먹해진다. 

역사의 공간을 돌아보다 보면 옛사람들 이야기인데도 감정이입이 되는 곳이 있다. 청령포가 유난히 그렇다. 청령포에는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뤄 아름답다. 지금도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단종의 애절한 사연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청령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릉이 있다. 단종의 애달픈 짧은 생애를 기리는 묘와 그를 끝까지 지킨 충신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장릉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비극과 충의가 깃든 곳이다. 단종을 생각하는 영월 지역민들의 마음은 각별하다. “슬프고 애달픈 삶을 살았던, 568년 전 그대를 만나기 위해 이 길을 걷습니다.” 올해도 단종유배길 행사 등 추모의 마음을 담아 단종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영화 ‘라디오스타’를 추억하다

이제 애잔함에서 조금 벗어나 보자. 그렇지만 이 또한 한참 전의 이야기다. ‘라디오스타’는 안성기·박중훈 주연,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영화다. 한때 가수왕까지 했던 왕년의 스타이며 퇴물 가수인 최곤(박중훈)과 작품 속 인물 그 자체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콤비의 연기가 녹아들었다. 20년 전인 2000년대 특유의 향수가 담겨 있는 영화다. 라디오스타박물관은 영월 시내 금강공원로에 자리 잡고 있다. 옛 KBS 영월방송국 건물을 리모델링해 영화 ‘라디오스타’ 관련 자료와 라디오의 역사 등을 전시했다. 추억을 소환하는 아릿함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 주변으로 공원 숲과 카페, 영월향교가 있어서 휴식의 시간을 보내기 좋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최곤과 박민수가 자주 드나들며 달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를 마시거나 배달도 시키던 청록다방은 영월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있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옛날식 다방 청록다방 앞에는 때 묻은 ‘라디오스타’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고, 맞은편으로 관풍헌이 보인다. 관풍헌은 영월 청령포로 유배 온 단종이 홍수를 피해 잠시 생활했고, 사약을 받은 곳이다. 관풍헌의 너른 마당에 들면 단종이 시를 읊은 장소라는 자규루와 푸르러가는 은행나무가 그 시절을 불러온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영월 한반도지형의 힐링 코스

영월 읍내를 나와 자동차로 20분쯤 달리면 선암마을에 다다른다. 평창강 끝머리의 한반도지형은 하천의 침식과 퇴적이 거듭되면서 이루어진 곳이다. 자연이 빚어낸 형상이 우연히도 한반도 지형이라니 신비롭기만 하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는 계단과 평지 포함 800m 정도 거리다. 숨차게 계단을 오르고 나면 완만하면서도 깊은 숲속 힐링 코스다. 솔숲 내음 속에 오래 머물고 싶어서 느리게 걷는다. 선암마을 한반도지형을 휘감아 도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땀을 식힌다. 여기가 어딘가 싶을 만큼 푹 파묻힌 깊은 자연 속의 짜릿함이라니. 이 자리에서 맞는 일몰은 더없이 끝내준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흐르는 강물 위로 섶다리 건너기

영월 주천면 판운리의 섶다리는 매년 만들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전통 다리다. 통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소나무와 참나무 등을 얹은 후 솔가지로 상판을 덮고 흙을 덮어서 푹신푹신하게 완성하는 섶다리는 전통과 자연이 만든 다리다. 매년 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함께 모아 다리를 만들고, 이듬해 여름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휩쓸고 간다. 또는 장마 무렵에 철거한다고 한다. 계절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기도 하는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다리다. 다리 건너편에는 캠핑장이 기다린다. 현대 과학의 산물인 초현대식 교량이 아닌, 여전히 우리네 삶이 그대로 이어지고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영월 동강의 섶다리 위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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