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답사기] 효의 도시 수원, 수원화성과 행궁동 산책
정조가 꿈꾼 도시를 걷는다. 수원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수원화성 성곽 너머에 서려 있을 누군가의 꿈은 드문드문 지나가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오래전 이야기가 담긴 성벽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성벽 산책로를 걷고 돌계단을 오르며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또 다른 계절을 만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화 ‘역린’은 이 한마디로 시작한다. 이는 정조의 즉위 첫마디였다. 누구나 꿈을 꾼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든 위험을 무릅쓴 일이든 그 목표는 이미 어떤 바탕을 딛고 있다. 조선 후기 제22대 왕 정조는 통치자로서의 소명과 함께 가슴속 깊이 품은 꿈이 있었다. 즉위 즉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자신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선언했다.
정조는 반란과 반역의 세월 속에서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개혁과 통합, 문화정치를 이루어냈고, 신도시 수원화성(水原華城) 건설(1794∼1796)에 이른다. 임금으로서의 시대적 소명, 어릴 적 비명에 간 아비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리움이 마침내 수원화성으로 발현됐다.
오늘날 수원을 ‘효(孝)의 도시’라고 일컫는 중심에 정조대왕이 있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명당인 수원 남쪽 화성으로 옮겼고, 이어서 아버지 묘소가 바라보는 팔달산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정조의 굳은 의지와 리더십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 개혁 정치가 현재 수원이라는 도시 정체성의 바탕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과 행궁동 산책
갑자기 날씨가 변덕을 부려도 괜찮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소중한 연차를 쓸까 말까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된다. 거길 가면 옛 분들이 지나다녔음 직한 고즈넉한 길이 있고, 적당히 낡은 것이 아름답다는 걸 보여준다.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벗어나면 첨단 공간이 이어지고, 그 앞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공원 옆 도서관을 지나면 운치 있는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역사를 품은 기품 있는 감성의 도시, 이 모든 게 수원에 가야 할 이유다.
성곽 둘레 5.7㎞의 반나절 코스 수원성 둘레길은 어디서든 상황에 따른 진입이 가능하다. 더구나 성곽이라고 위엄을 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열려 있다. 시민들에게는 사철 동네 산책로이자 안식처로 늘 그 자리에서 함께한다.
숨차게 오른 팔달산 산마루 서장대에선 성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당시 사방 백 리(약 39㎞) 안팎의 모든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수원화성의 군사 지휘 본부였다. 정조의 필체인 편액과 시문도 보인다. 멀리까지 시야가 트여 현대 도시와 품격 있게 조화를 이룬다. 일출과 일몰 명소이기도 하다. 출발은 행궁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오르는 게 쉽고,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일렁이는 화서문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이제 서장대에서 내려와 행궁동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공방 거리로도 유명한 행궁길은 볼거리나 체험할 거리뿐 아니라 맛집과 카페가 즐비한, 이른바 행리단길이다. 그 골목을 걷다 보면 낮은 담 너머로 얼핏 잘 가꾼 정원과 제철 꽃이 피어 있는 단아한 2층 가옥이 보인다. ‘열린문화공간 후소’는 시민들에게 예술과 인문학의 깊이를 제공하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틈내어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너른 마당이 나온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광장에서 오늘을 사는 이들이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꿈꾼다. 정조는 신풍루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열며 수원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신풍루 앞에서는 ‘수원화성 태평성대’ 프로그램을 비롯해, 매일 조선시대 군사 무예를 재현하는 공연을 한다. 편리하게 수원화성의 주된 여행 포인트를 돌아보고 싶다면, 이색적인 투명 영상이 표출되는 창문이 설치된 ‘XR 버스 1795행’을 타고 출발하면 된다. 또 성곽 주요 지점을 순환하는 ‘화성어차’도 있으니 수원관광안내소의 도움을 받아 탈 수 있다.
무엇보다 신풍루 앞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 눈여겨볼 만하다. 600년 넘는 수령의 느티나무는 행궁이 건축되기 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나무다. 고목 한가운데 어린아이 몇 명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생겼고 한때 고사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나무에서 기적의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영험한 기운을 지닌 나무로 알려져 치성드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한동안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새끼줄에 매달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의 신령함을 믿는 민족답게 수원의 신목(神木)이 된 느티나무다.

신풍루가 있는 수원행궁 광장 옆으로 수원시립미술관 건축물이 멋지다. 지역 예술의 플랫폼인 미술관 로비 카페테리아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휴식 중이다. 전시 관람 후 옥상정원에 올라 행궁동을 내려다보는 여유로움을 챙기는 건 기본이다. 특히 수원을 대표하는 예술가 나혜석 기념홀도 둘러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또는 시대를 앞서 살아간 사람으로 알려진 나혜석의 작품과 어록, 삶과 작업을 살필 수 있다. 수원에는 나혜석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 더 있다. 행리단길 나혜석 생가터 골목, 효원공원 옆 인계동 번화한 거리 초입과 끄트머리에 나혜석 상과 기념비가 세워진 나혜석 거리가 있다.
수원은 어디서든 세월의 깊이가 기본값이다. 그런데도 언제나 새롭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뜻의 방화수류정 아래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용연에서 선조들이 즐겼던 풍류가 수원화성 축성 23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진다. 그 자연 속을 뒷짐 지고 천천히 걸어봐도 좋고, 때로는 드라마 ‘대장금’을 촬영한 행궁길을 산책하거나,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솔이와 선재의 집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촬영지에서 우영우처럼 먹는 김밥도 별미다. 팔달문 인근의 통닭 거리에선 영화 ‘극한직업’의 잠복근무 형사들처럼 통닭을 먹는 즐거움 또한 쏠쏠하다.

공원 옆 도서관에서 힐링, 독서도시 수원
수원 도심을 오가다 보면 자연이 듬뿍 담긴 수목원과 공원, 멋스러운 도서관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국내 최대의 도심 속 수변공간인 광교호수공원은 물론이고, 그 공원 옆으로 도서관이 함께한다. ‘독서도시 수원’ 비전 선포식을 한 도시답다. 수원은 도서관마다 문학, 생태환경, 여행과 레저, 미술, 건강, 과학 등으로 특화돼 똑똑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힐링 콘텐츠의 광교푸른숲도서관은 도서관 중의 스타급이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호수공원 옆 숲속에 앉힌 푸른숲 책뜰은 책을 읽으며 힐링할 수 있는 캐빈 형식의 독서 공간으로 인기가 많다. 지난해 개관한 광교의 경기도서관은 전국 최대 규모의 공공도서관이다.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을 넘어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일상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기후·환경이 주요 주제인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면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역사와 일상이 만나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능소화가 피어나고 여름과 가을 사이엔 연꽃과 배롱나무꽃으로 봉녕사 절집이 화사하다. 우리의 농경문화와 일 년 열두 달 농가 월령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는 국립농업박물관에 가면 마음이 풍요롭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숲의 노송지대는 한층 더 의미 있다. 북수원의 관문인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길목이었다. 당시 정조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 천 냥을 하사해 소나무를 심게 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많이 고사했지만, 노송지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역사를 가늠케 하는 소나무 숲은 이미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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