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는 우리 정서와 소망 가장 잘 담은 그림”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 관장
아는 것 없이 민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청년은 도깨비에 홀린 듯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강산이 다섯 번도 넘게 바뀌는 시간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천대하던 민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그야말로 아찔하고 요상한 세상이 되었다. 민화를 문화로 바꾼 사람,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민화에 담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조도깨비’ 만나 ‘새끼 도깨비’ 된 청년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의 이야기는 반세기를 훌쩍 넘는 시간여행으로 시작한다.
“예전에는 취업이 쉬웠어요. 대학 졸업하면 교사 자리는 어렵지 않게 얻던 시절이니, 영문과 나온 시골 청년을 불러주는 곳이 없었으면 교편을 잡았을지도 모르지. 에밀레박물관에서 조자용 선생을 만나며 인생이 달라졌어요.”
1973년 5월을 회상하는 윤 관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당시 조자용 선생은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따온 국내 유일의 인물이었는데, 유망한 건축가의 길을 접고 남들 다 무시하는 민속문화에 빠져 지내니 사람들이 ‘조도깨비’, ‘헛똑똑이’라고 했죠. 그러니 그 밑에 있는 새끼 도깨비는 사람 취급이나 받았을까.”
지금이야 조자용 선생을 우리 민속과 민중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선구자이자 민화 연구의 중시조로 인정하지만, 선생이 타계한 후 국내 1호 민간 민속박물관인 에밀레박물관이 불타고 방치되었을 정도로 무심한 공백기도 있었다. 그 냉담한 무관심 시절 민화에 지속적으로 숨을 불어넣은 이가 윤열수 관장이다.
1947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수집벽이 있었다. 그러나 넉넉하기는커녕 어려운 형편인지라,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모으지 못했다. 헐값을 치를 필요도 없던 기와 조각이며 부적 따위를 손에 넣고 좋아라 한 것이다. 그런 청년이 민학회를 설립하고 훗날 초대 한국박물관협회장을 지낸 조 선생을 만났으니, 가뭄 끝에 물 만난 나무처럼 쑥쑥 자랐다.
그는 에밀레박물관에서 민화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1973년부터 동서고금 유례없던 해외 민화 전시 경험을 했다.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에는 만신 김금화 선생을 비롯한 무형문화유산을 초대해 미국에 선보이는 기획도 맡았다.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천대받던 장르에 세계인이 환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민화의 가치를 확신했다. 이후 민화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곳, 우리 민화를 찾는 곳이라면 국경 넘는 일도 서슴없이 나선 그는 그 공로를 대통령 표창으로 인정받았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아내의 월급봉투
으레 수집벽은 역마살을 동반한다. 전국을 다니며 논바닥, 남의 집 사랑방, 스러진 주막, 동굴 속 신당, 깊은 산 절간 등을 헤집고 다니면 박물관에서 받는 월급은 바람에 스치는 낙엽보다 가볍게 흩어졌다. 가산을 털어 민화와 민속품을 사들인 이력은 헤아릴 수준이 아니다.
“대학 시절 칼 스트롬이라는 미국 친구의 우리나라 불화 조사에 동행하며 사진 기록의 중요성을 느꼈죠.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다녔는데, 카메라 욕심은 여전해서 항상 최신형 스마트폰을 써요. 가회민화박물관을 개관하고 2년 뒤엔가 필름을 스캔할 스캐너를 들였어요. 요새는 수십만 원이면 사지만, 당시엔 2000만 원이 넘어서 2년 동안 할부금을 냈죠.”
삼성출판박물관 개관 당시 실무 책임자를 지낸 경험은 그에게 민화 전문 박물관이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2002년 가회동 한옥에 가회민화박물관을 차릴 때도 이렇다 할 자금이 없어 공모 사업을 통해 박물관 문을 열었는데, 입장료는 무료다. 조선시대 전통 민화 소장품 수로 첫손에 꼽히는 박물관으로 거듭난 이력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국내에 민화 붐이 일기 전까지 민화나 민속에 관심을 보인 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었어요. 그 친구들과 전국을 쏘다니며 조사하고 수집하다 보면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닌데, 학예사나 관장이 됐다고 별도리 있겠습니까. 아내가 ‘민화에서 제일 가는 사람은 그래도 윤열수여야 하지 않겠나’ 하며 본인 월급을 찔러준 덕이죠.”
그의 반려자이자 조선시대사 전공으로 한국학중앙연구소 인문학부 교수를 지낸 최진옥 씨의 이런 노고는 민화계에서 다 아는 이야기다.
“지난해 아내가 세상 떠나기 일주일 전엔가 처음 말하더군요. 자기가 받은 봉급이 얼마였다고…. 그 돈이 있어 지금껏 박물관을 유지했습니다.”
세상 가장 든든한 뒷배가 있었으니, 남들이 말리는 일을 벌일 때도 두려움이 없었다.
“민화 전문지가 필요하다고 해서 2014년 월간 ‘민화’를 창간하며 발행인을 맡을 때도 남들은 요즘 세상에 무슨 종이 잡지를 내냐고 말렸어요. 망할 거라고 말이죠. 지금은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잡지는 여전히 나오고, 조자용 선생을 기리는 ‘대갈문화축제’도 성대하게 치르고 있죠. 민화 인구가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한참 됐고, 뛰어난 민화 연구자도 많이 생겼어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말하자면 그가 민화 연구의 기틀을 세우기 전까지 미술사학계에서 민화는 제대로 대접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제작 연도 및 작가 미상의 족보 없는 그림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디까지 민화로 인정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누구는 고구려 고분벽화, 어느 이는 조선시대 궁중화, 또 다른 이는 불화나 무신도까지 민화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영·정조 시대부터 1960년까지 그린 그림을 전통 민화, 그 이후는 현대 민화로 봅니다. 화목(畵目)은 조자용 선생님이 구분한 20종을 따르고, 기도를 위해 제작한 불화나 무신도는 민화와는 다른 장르로 봐야 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반세기에 걸쳐 민화만을 추적해온 그는 한국민화학회 회장, 국가유산청 문화재위원,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등의 자리를 두루 거쳤다. 학문적 토대와 작품을 감정하는 안목,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인맥 등을 인정받아 마침내 한국박물관협회 제11대 회장 자리에도 올랐다.
민화의 개념 정립, 지역별·시대별 화풍 변화와 이해, 무명작가 계보 추적, 민화 작가들을 위한 이론 교육 등 그가 이룬 성과는 후배 연구자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민화와 작가들을 향한 시선 또한 달라졌다. 전통과 현대, 국내와 해외 가릴 것 없이 민화 전시회가 연달아 열리고 세간의 이목을 모은다. 우리나라 1세대 미술사학자로 명망 높은 안휘준 교수는 이 같은 민화 열풍에 주목하며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민화 융성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손주 보듯 우리 문화의 미래를 보다
그런 그도 손주들 사진을 들여다볼 때는 여느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눈꼬리가 휘어지고 입가를 올린 미소로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40세에 얻은 무남독녀 외딸이 안겨준 손주들이니 어찌 귀하지 않을까.
그런 그에게 민화, 나아가 문화는 또 다른 자식이다. 가회민화아카데미를 설립해 기능인 취급을 받던 민화 작가들에게 이론 교육의 장을 열어주어 현대 예술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했으며, ‘대갈문화축제’의 한 축으로 현대 민화 공모전을 열어왔다. 일찌감치 시작한 가회민화박물관의 ‘전국 어린이 민화그리기 대회’는 ‘세계 초등학생 민화그리기 공모전’으로 범주를 넓혔다. 아카데미와 공모전은 올해로 스물두 살이 되었다.
윤 관장은 “아이들 그림은 형식이 자유롭고 표현이 순수해 민화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박물관의 역할이 미래세대의 교육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최근 주목하는 분야는 과학기술이다.
“민화는 밑그림(초본, 初本)을 모사(摹寫)해 다량생산이 이뤄지기도 했어요. 또 실용성과 장식성이 강한 그림이라 저작권 인식은 다소 취약한 면이 있습니다. 말만 하면 인공지능이 그림까지 그리는 시대잖아요. 기술 발전에 따라 예술의 정의나 범주가 달라져왔습니다. 민화계도 ‘인공지능 시대, 작품의 저작권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죠. 한편으로는 기술을 잘 이용해서 우리 민화의 무궁무진한 활용 방안을 구상해 새로운 먹거리도 찾을 수 있겠고요. 이제 우리의 시선은 거기까지 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식견을 배우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에 박물관 문턱은 갈수록 낮아진다. 어제의 청춘이 오늘은 백발이라는 말이 있지만, 맨발로 4시간 산행을 소화하고 내키면 막걸리 두 병도 비워내는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는 동안이 전부 현역 시절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요. 요즘은 세상 떠나기 전까지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은 무엇인가 고민하곤 해요. 그간 수집한 작품과 데이터를 잘 정리해서 후손에 물려줘야겠지요. 젊은 시절부터 찍어온 필름을 정리하니 9만 6840장에 이르더군요. 지금은 사라진 우리 문화와 풍습이 담긴 자료들이죠. 이 자료를 모두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먼 길 돌아 다시 민화를 본다. 청년의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긴 세월 그를 매료시킨 그림을 말이다. 가정의 달 5월이면 민화 속 상징이 한층 다르게 다가온다. 화조도 한 점에 인간의 생로병사와 이를 극복하고 싶은 소망이 모두 담겼다. 부귀영화를 뜻하는 연꽃에 다산을 상징하는 연자와 자손 번영과 출세를 뜻하는 물고기,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가 어우러져 우리네 자연 모습 그대로 화폭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민화가 말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다복하게 오래오래 살라’고. 이를 소망하는 것 또한 역사 깊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