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국의 글발 만들기] 특정 주제 10시간 이상 설명할 수 있어야
2008년 초 청와대를 나온 후 만나는 사람마다 8년 동안의 청와대 경험에 관해 물었다.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했으며, 내가 모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고, 재미있는 일화는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때마다 주저리주저리 얘기했고, 이렇게 5년 동안 말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 긴 이야기 한 편이 만들어졌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게 됐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내 얘기는 점점 더 재밌어졌다. 그러다가 출판사에 들어가게 됐고, 남들이 책 쓰는 걸 보면서 내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도 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2014년 나온 책이 ‘대통령의 글쓰기’다.
말해보고 썼다
어떤 주제에 관해 10시간 이상 말할 수 있으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 기업 회장과 대통령의 연설문을 쓸 때 연설 시간에 맞는 분량을 써야 했다. 15분 연설이면 문자 크기 10포인트로 A4 용지 2장 반을 써야 한다. 책에 들어가는 글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므로 1시간 말할 수 있으면 15분짜리 4개의 글이 나오고, 10시간 말하면 40개의 글을 쓸 수 있다. 40개 글이면 한 권의 책이 된다.
말을 누구에게 할 것인가. 친구도 좋고, 배우자나 자녀도 좋고, 직장 동료도 좋다. 일정 기간 만나는 사람마다 쓰고자 하는 책의 주제와 내용에 관해 말해보라. 물어보지 않아도, 듣기 싫은 내색이어도 말이다. 정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혼자 걷거나 목욕하면서, 카페에 앉아, 버스를 타고 가거나 운전하면서 말해보라.
글은 보고 듣고 읽고 겪은 내용을 쓰기도 하지만, 상상력과 창의력으로도 쓴다. 상상력은 무엇인가. 어떤 주제를 놓고 머릿속에서나 말로 그려보는 것이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혼잣말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도 있고, 말로 풀어볼 수도 있다. 상상하다 보면 생각이나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게 무언가가 만들어지면 바로 창의력이 작동한 셈이다. 그러므로 창의력을 꽃피우려면 상상의 나래를 펴야 한다.
메모로 썼다
나는 블로그, 페이스북, 스레드 등에 문단 수준의 짧은 글을 즐겨 쓴다. 지난 10년 동안 2만 개 넘게 썼다. 한동안 블로그에만 1000개 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 글로 책을 만들고자 마음먹고 각각의 글을 출력했다. 사흘간 방을 하나 빌려 1000장 넘는 글을 50개 정도의 덩어리로 분류했다. 방바닥에 늘어놓고 비슷한 내용끼리 묶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후 덩어리 하나씩 가지고 글을 썼다. 40개 넘는 글이 써졌고, 책이 나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강원국의 글쓰기’다.
책에 들어갈 글을 하나 쓰는 데 15~20개 정도의 문단이 필요하다. 한 권의 책에 40개 정도의 글이 들어가야 한다면 40개 × 20개 = 800개 문단이 필요하다. 넉넉잡고 1000개 정도의 짧은 글을 쓰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것이다.
1000개 정도의 짧은 글을 써서, 이 글을 조립해 40개의 글을 만들고, 이 글을 결합해 책을 내면 된다. 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지만 매일 짧은 글을 한두 개씩 쓰는 일은 부담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즐거운 소일거리가 될 수 있다. 1년에 500개 정도 쓸 수 있으니 그래도 2년 정도는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연재로 썼다
자기 의지만으로 쓰긴 어렵다. 스스로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바로 연재하는 것이다. 책 한 권이 되려면 40개 안팎의 글이 필요하다. 40번 연재하면 된다. 연재할 매체는 많다. 물론 기존 신문과 잡지는 어렵다. 하지만 원고료 받는 걸 포기하고 온라인 매체의 문을 두드려 볼 수 있다. ‘회장님의 글쓰기’ 역시 모 인터넷 경제 매체에 연재했다.
기고 주기는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야 한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기고하는 건 무리다. 격주로 하거나 한 달에 한 번 주기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통상 4주에 한 번씩 기고한다. 그래도 마감일이 시도 때도 없이 금세 돌아온다.
함께 썼다
책을 혼자 쓸 필요는 없다. 남과 함께 쓰면 훨씬 용이하게 쓸 수 있다. 더불어 쓰는 첫 번째 방법은 공저를 내는 것이다. 함께 쓰는 사람의 숫자를 늘릴수록 내가 써야 하는 글의 편수는 줄어든다. 어떤 책은 각자의 글 한 편씩 모아 내기도 하고, 다섯 명 정도가 대여섯 편씩 모아 엮기도 한다.
더불어 쓰는 두 번째 방법은 대담 형식의 공저다. ‘말하기의 태도’란 책은 전 문화방송 김민식 피디와 함께 썼다. ‘글쓰기 바이블’도 옛 청와대 동료였던 백승권 대표와 서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썼다. 10여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누고, 이를 녹취해서 글로 푼 후, 각자 읽어보고 자신이 말한 부분을 보완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더불어 쓰는 세 번째 방법은 각자의 단독 저서를 내되, 쓰는 과정만 함께하는 것이다. 책을 쓰는 동안 단톡방을 만들어 각자 쓴 글을 수시로 올려 의견을 수렴하고,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를 응원하고 독려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 나중에 책을 팔 때도 십시일반 소화하기 쉽고, 공동 출간기념회를 열 수도 있다.
책으로 썼다
책으로 책을 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세 종류의 빡센 독서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쓰고자 하는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다. 나는 통상 쓰고자 하는 분야의 책 서른 권 정도는 보는 것 같다. 말이 서른 권이지 책 내용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대여섯 권 읽고 나면 나머지 스물댓 권을 독파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두 번째는 ‘모델북’을 한 권 찾아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나도 이런 책 한 권 쓰고 싶다’는 책을 찾아, 그 책의 제목부터 구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연구해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쓰고자 하는 책의 꼴을 선명하게 그리고, 집필 의지를 다질 수 있다. 책 쓰는 일은 마라톤 경주와 같아서 골인 지점을 명확히 하고, 그곳에 이를 때까지 쉼 없이 열정을 식히지 않아야 완주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어도 되고, 한 권을 여러 번 읽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작가의 문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방법은 반복이다. 반복하면 몰입하고, 몰입하면 빙의될 수 있다. 한 달 정도 한 작가의 책에 빠져 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게 된다.
동시다발로 썼다
방법은 간단하다. 노트북이나 컴퓨터 바탕화면에 책 한 권 쓰는 데 필요한 40~50개 글의 문서를 깐다. 처음부터 40~50개 문서를 깔 순 없을 것이다. 생각나는 것부터 쓰다 보면 추가로 생각나고, 새끼를 치게 된다. 서너 개 문서로 시작해 점차 개수를 늘려가면 된다.
쓰는 방식도 40~50개 문서를 동시에 채워나가는 식이다. 자료를 찾다 보면 이 문서 저 문서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야금야금 문서를 채워가고, 어느 정도 문서가 채워졌다 싶으면 문서를 하나씩 열고 글을 써나간다.
경쟁 도서로 썼다
책은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쓴다. 다시 말해 팔기 위해 쓴다. 팔리기 위해서는 다른 책보다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쓰고자 하는 분야에 이미 나와 있는 책 가운데 많이 팔린 책 30권을 골랐다. 고르는 건 어렵지 않다. 온라인 서점이나 포털 사이트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검색해본 책이나 많이 판매된 책 목록이 뜬다. 이 책들의 목차만 출력한다. 이 또한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다.
우선 30권의 전체 목차를 훑어본다. 이때 할 일은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다. 이 주제에 관해 주로 다루는 내용을 파악한다. 책 쓰기를 밥상 차리기에 비유한다면 이 내용은 밑반찬에 해당한다. 대학 강의로 치면 필수 전공과목이다. 예를 들어 ‘글쓰기’ 책이면 어떤 글이 좋은 글이고, 그런 글은 어떻게 쓰고 고치는지가 들어가야 한다. 진부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도 김치가 빠지면 서운한 법이다.
다음으로 30권의 목차 각각에서 글감을 찾는다. 다른 책에선 다루지 않은 그 책만의 신선한 글감을 한두 개씩 캐낸다. 이미 앞에서 전체 목차를 일별해봤기에 각 권별로 참신한 글감을 찾는 일 또한 누워서 떡 먹기다. 단 이때 캐내는 글감은 내가 쓸 수 있고, 쓰고 싶은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참신하면서도 쓸 수 있는 글감을 찾아야 한다. 30권의 책에서 한두 개씩 찾으면 너끈히 책 한 권 분량의 글감을 확보할 수 있고, 그러면 벌써 절반은 쓴 셈이다. 내가 쓸 수 있는 내용만 골랐으므로 쓰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사실 우리 머릿속에는 쓸거리가 이미 있다. 자신이 모를 뿐. 하지만 다른 책의 목차를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 권에서 새롭고 신선한 내용만 추려냈기 때문에 구태의연하지 않다.
요약으로 썼다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쓴다. 이곳저곳에 물불 안 가리고 쓴다. 이 방식은 분량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한 편을 쓰든 두 편을 쓰든, 한 시간을 쓰든 단 1분을 쓰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는 게 중요하다. 글을 쓰는 것과 함께 과거에 써놨던 일기・편지・메모 등을 수집하는 일도 병행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분량을 늘리고 자료를 수집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억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글에 써먹을 수 있는 기억은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이 있다. 의미기억이 독서와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이라면, 일화기억은 각자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경험, 그로부터 만들어진 일화기억을 되살리면 많은 분량을 마련할 수 있다.
두서가 없더라도 A4 용지 100장 정도 손에 쥐게 되면 정리하는 일은 출판사 편집자 등 전문가의 손을 빌릴 수도 있고, 자신이 직접 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어렵지, 있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지난 10년 동안 10권의 책을 썼다. 10권을 쓰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됐던 건 질문과 공부다. 나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독자들이 책을 읽는 목적은 여럿이지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읽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 독자들의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 질문에 시원하게 답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읽히고 팔리는 책이 된다.
또한 질문을 알아차리고 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적어도 책을 쓰는 동안은 그 주제만 생각하고, 그것에 관한 책과 자료, 강의에 몰입해야 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미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생활의 최우선 순위를 책 쓰기에 두고 집념을 불태우면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