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가이드] 이혼 후에도 법적 절차 통해 혼인무효 가능해
남녀가 만나 호감이나 사랑을 느끼고 가정을 이루기로 결심한 후, 혼인신고를 하면 법률적으로 부부가 된다. 결혼식 같은 행사는 혼인 성립의 법률적 요건이 아니다.
[민법]
제812조(혼인의 성립)
①혼인은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정한 바에 의하여 신고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
②전항의 신고는 당사자 쌍방과 성년자인 증인 2인의 연서한 서면으로 하여야 한다.
혼인 당사자가 시청, 군청, 구청 등 관할 관청에 가서 신고하고 수리되면 혼인의 효력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법원은 개입하지 않는다. 혼인의 해소 절차와 크게 다른 점이다.
혼인의 해소
혼인관계는 이혼, 혼인의 무효, 취소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녹녹지 않다.
가장 간단한 해소 형태는 미성년자 자녀가 없는 혼인 당사자가 협의로 이혼하는 경우다. 이 경우만 하더라도 부부는 가정법원 협의이혼의사확인 신청을 하고, 기일 지정을 기다려 법원의 사법보좌관(예전에는 판사가 담당했다) 앞에서 그 협의이혼 의사를 확인받아야 한다. 이혼 의사가 합치되지 않으면 재판상 이혼 청구, 즉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혼인의 무효, 취소도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혼인의 해소 과정에는 법원이 개입해서 그 요건이 성립되는지 살핀다. 혼인신고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해소는 어렵다. 혼인으로 형성된 가정의 현 상황, 법적 상태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일 것이다.
이혼하는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대방 배우자는 밉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너무도 소중해서 건강한 이혼을 하고 자녀가 자라는 데 아무 탈 없기만을 바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당사자조차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속아서 결혼했다. 이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한탄은 이혼을 고려 중인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현재 없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혼인이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 민법은 마련해두고 있다. 혼인의 무효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민법]
제815조(혼인의 무효) 혼인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의 경우에는 무효로 한다.
1. 당사자 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때
2. 혼인이 제809조 제1항의 규정을 위반한 때
3. 당사자 간에 직계인척관계(直系姻戚關係)가 있거나 있었던 때
4. 당사자 간에 양부모계의 직계혈족관계가 있었던 때
혼인의 무효
혼인의 무효는 혼인 성립 이전 단계에서 성립 요건의 흠결로 인해 혼인이 유효하게 성립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혼인의 취소는 혼인의 성립 과정에 어떠한 흠결이 있을 때 그 혼인의 효력을 장래를 향하여 소멸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처음부터 효력이 없는 혼인의 무효와 구별된다.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경우는 당사자 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때(민법 제815조 제1호)와 당사자 간이 근친인 때(민법 제815조 제2 내지 4호)로 나눌 수 있다.
‘당사자 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때’란 어떤 경우일까. 혼인의 합의란 당사자 사이에 부부관계로 인정되는 정신적·육체적 결합을 할 의사 및 법률상 유효한 혼인을 성립케 할 의사의 합치를 말한다.
혼인신고에 관한 형식적인 의사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질적인 혼인 의사가 없었다면 무효라고 보아야 한다. 실무상 이 문제는 주로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혼인에서 피고가 처음부터 혼인할 의사 없이 단지 한국에 입국할 목적으로 형식적으로 혼인신고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원고가 혼인 무효를 구하는 사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혼인 의사는 혼인신고서가 수리될 때까지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혼인신고서 작성 후 제출 전에 한쪽이 혼인 의사를 철회했다면 혼인은 무효다.대법원 1983. 12. 27. 선고 83므28 판결) 또한 혼인식을 거행하고 사실혼관계에 있었으나 일방이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사이에 혼인신고가 이루어졌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혼인은 무효다.(대법원 1996. 6. 28. 선고 94므1089 판결)
혼인의 무효는 꼭 소송을 제기해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통상 혼인 무효의 소를 제기함으써 이를 확인받는 절차를 거친다. 당사자, 법정대리인 또는 4촌 이내의 친족은 언제든지 혼인 무효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별도의 소명이 없더라도 혼인 무효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그 외의 사람도 법률상 이익이 있다면 제기할 수 있다고 본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소를 제기할 때는 배우자가 상대방이 된다. 제3자가 제기할 때는 부부를 상대방으로 하고, 부부 중 일방이 사망한 때는 생존자를 상대방으로 한다. 상대방이 될 자가 사망한 때는 검사를 상대방으로 소를 제기할 수 있다.
가사소송 하면 흔히 조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혼인 무효의 소는 조정 대상이 되지 않는다. 부부가 합심하여 이 결혼은 무효라고 외쳐도, 법원은 직권으로 사실조사 및 필요한 증거조사를 하여 무효 사유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한편 혼인신고는 당사자 쌍방과 성년자인 증인이 연서한 서면으로 해야 하지만, 신고 자체는 당사자 일방이 하더라도 가능하기 때문에 혼인 무효 소송에서는 상대방이 원고의 동의 없이 임의로 원고 명의의 혼인신고서를 작성한 다음 일방적으로 신고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신고자가 사문서위조죄나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실이 있으면 원고의 주장을 인정할 유력한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이혼’과 ‘혼인 무효’의 관계
이혼으로 혼인관계가 해소되었다면 그 전의 혼인관계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된다.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기도 바쁠 텐데, 이미 지나간 혼인관계가 무효인지 확인할 실익이 있을까.
과거 대법원은 ‘단순히 여자인 청구인이 혼인하였다가 이혼한 것처럼 호적상 기재되어 있어 불명예스럽다는 사유는 청구인의 현재 법률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이혼신고로써 해소된 혼인관계의 무효 확인은 과거의 법률관계에 대한 확인이어서 확인의 이익이 없다’고 판결하기도 했다.(대법원 1984. 2. 28. 선고 82므67 판결 등)
이와 관련해 최근 대법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을 선고하면서, 위 과거 판결을 변경했다.
사례
- 혼인신고를 하여 법률상 부부였던 원·피고는 이혼조정이 성립함에 따라 이혼신고를 마쳤음. 원고는 혼인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극도의 혼란과 불안, 강박 상태에서 혼인에 관한 실질적 합의 없이 이 사건 혼인신고를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혼인 무효 확인을 구함.
- 원심은 혼인 무효 확인을 구하는 주위적 청구에 대하여는 ‘혼인관계가 이미 이혼신고로 해소되었다면 위 혼인관계의 무효 확인은 과거의 법률관계 확인으로서 확인의 이익이 없다’는 취지의 대법원 1984. 2. 28. 선고 82므67 판결을 인용하면서 원고와 피고 사이에 이미 이혼신고가 이루어졌고, 이 사건에서 원고의 현재 법률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어 확인의 이익이 없다고 판단. → 원고, 대법원에 상고
[대법원 2024. 5. 23. 선고 2020므15896 판결]
위 사안에서 대법원은 ‘이혼으로 혼인관계가 이미 해소되었더라도, 과거의 법률관계인 혼인관계 자체의 무효 확인을 구하는 편이 관련된 분쟁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유효·적절한 수단일 수 있으므로, 혼인관계가 이미 해소된 이후라고 하더라도 혼인무효의 확인을 구할 이익이 인정된다’며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 주었다.
대법원이 이와 같이 판결한 이유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효인 혼인과 이혼은 법적 효과가 다르다. 무효인 혼인은 처음부터 혼인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척이거나 인척이었던 사람과의 혼인금지 규정(민법 제809조 제2항)이나 친족 사이에 발생한 재산범죄에 대해 형을 면제하는 친족상도례 규정(형법 제328조 제1항 등) 등이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혼인관계가 이혼으로 해소되었더라도 그 효력은 장래에 대해서만 발생하므로 이혼 전에 혼인을 전제로 발생한 법률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예를 들어 이혼 전에 부부의 일방이 일상의 가사에 관하여 제3자와 법률행위를 한 경우 다른 일방은 이혼한 이후에도 그 채무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부담할 수 있지만(민법 제832조), 혼인 무효 판결이 확정되면 제3자는 다른 배우자를 상대로 일상 가사 채무에 대한 연대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혼 이후에도 혼인관계가 무효임을 확인할 이익은 엄연히 존재한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회한에 대한 심리적 보상도 무시할 수 없다. 당사자의 실질적인 권리 구제에 한 걸음 다가간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
다만 혼인 무효 소송을 함부로 제기할 것은 아니다. 실무상 혼인 무효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당사자 사이에 명시적인 혼인의 합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사실혼관계에 있는 등 일정한 경우 그 혼인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비록 사실혼관계에 있는 당사자 일방이 혼인신고를 한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혼인 의사가 결여되었다면 그 혼인은 무효다. 그러나 상대방의 혼인 의사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혼인의 관행과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사실혼관계를 형성시킨 상대방의 행위에 기초하여 그 혼인 의사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으므로 이와 반대되는 사정, 즉 혼인 의사를 명백히 철회하였다거나 당사자 사이에 사실혼관계를 해소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등의 사정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그 혼인을 무효라고 할 수 없다고 대법원은 판결하기도 하였다.(대법원 2000. 4. 11. 선고 99므1329 판결 등).
가족관계에 대한 시각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1980년대 대법원 판결이 바뀌는 데 40년 넘게 걸렸다는 것만 보더라도, 삶에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진리다.